고등학교 2학년이 된 정수는 거의 모든 과목에서 두각을 내보였다.
영어는 1학년 겨울방학에 학원 수업을 통해 '성문종합영어'가 너덜너덜 해지도록 이미 보고 또 봤다. 마찬가지로 수학 역시 그때 수강한 해법수학 II를 통해 고등학교 전과정 수학을 이미 마쳤다.
당시의 대학입시는 예비고사라는 것만 통과하면 가고싶은 대학을 지원하고 국영수만으로 따로 대학 주관의 본고사를 치러 당락을 결정했다. 본고사 수준은 학교에서 가르치던 것과는 차이가 많았다. 시간을 두고 더 깊은 공부를 해야했다. 적지 않은 친구들이 영어와 수학에서만큼은 1학년을 마칠 즈음이면 이미 고등학교 전과정을 한번 정도는 훓었었다.
영어와 수학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도 선생님의 강의와 교과서, 그리고 참고서를 통해, 무엇보다 안광이 지배를 철할 정도의 독학으로 익혔었다. 전체에 대한 이해의 끈을 놓지 않고 문제를 풀어가거나 맥락을 쫒아가며 얻었던 경험이 그 바탕에 있었다. 평소 정수는 덜렁덜렁 했지만 공부만큼은 나름대로 지독스럽게 강박적이었다. 맥락 상 자연스런 연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었다.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할 때나 궁금한 것을 선생님께 질문할 때 그것들은 고스란히 드러났었다. 선생님들뿐 아니라 동급생들도 그런 정수를 인정했다.
특히나 동급생 가운데서 누군가가 의문이 생겨 정수에게 도움을 청하면 최선을 다 해 친절하게 도우려 했다. 항상 따뜻한 미소로 격려를 대신했다.
그렇게 정수는 완장이 아닌 온화함과 따뜻함으로 무장했었다. 스스로 겸손하게 보이려 애썼다. 그 결과 정수는 실제 그래 보였다. 정수가 뒤집어쓴 페르소나는 그렇게 지적이고 따뜻하고 나름 세련된 것이었다.
뒤늦게 알았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나서 그것이 껍데기였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면.
알고보니 그맘때의 겸손은 겸손이 아니었다. 속으론 '짜~식들', 혹은 '한심한 선생들 같으니'와 같은 마음이 깔려 있었다는 것을 아는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자기자신마저도 속이는 페르소나의 교활함이란.
지나간 '정수란 이'의 얘기들
프롤로그
1. 부담
2. 지적 허영
3. 분노, 그리고 두려움
4. 피해의식, 두려움과 분노가 만났을 때
5. 권력, 완장의 다른 이름
막간
6. 도둑질
7. 자존심이란 이름으로 덮힌 부러움과 질투
8. 나르시스
9. 소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