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당신이 전문가나 권위자라 여겨지고 있다면 더더욱 더-
어제 박진영이 종교집회에서 '과학'에 대해 한 말이 언급된 기사를 보고 저는 이 유홍준의 사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전 문화재청장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명성이 높은 유홍준은 국립박물관 입장료 유료화에 대해 주장하며 MBC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 박물관 (British Museum, ’대영 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인데?"
"거기는 남의 나라 물건 빼앗아 가지고 온거기 때문에 못받는 것 뿐이에요."
그런데 그의 발언은 다음의 3가지 이유에서 완전히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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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박물관을 비롯한 영국의 국공립 미술-박물관의 무료화 정책은 간단히 '약탈 문화재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국 내에서 박물관 입장료 무료화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논쟁은 일찍이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보수당 측은 '박물관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해서는 박물관의 재정 자립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박물관 유료화를 주장해왔고, 노동당 측은 '박물관의 공공성'을 근거로 박물관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료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오랜만에 노동당이 집권을 하며 (당시 총리가 토니 블레어) 적극적으로 박물관 무료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무료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서 1999년에는 어린이들에 대한 무료화, 2000년에는 60세 이상 노인에 대한 무료화가 실현되었고, 결국 2001년부터는 완전 무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료화가 이루어진 직후 영국의 국-공립 미술-박물관들은 재정 확충에 있어서 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정부의 적절한 보조와 다양한 유료 프로그램의 시행 등을 통해서 현재는 지속가능한 상태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회적 반응도 너-무 좋아서 정치적으로도 이 정책을 포기하기에는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즉 영국의 미술-박물관 무료화는, 무슨 '약탈 문화재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가 '사회적 토론'을 거쳐 실현된 매우 바람직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 박물관의 소장품이 약탈 문화재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국 박물관 소장의 영국 문화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잉글랜드 남동쪽 해안의 '서튼 후 Sutton Hoo'에서 출토된 문화재들입니다. 서기 6-7세 앵글로-섹슨 시대의 이스트 앙글리아 왕국의 매장지로 사용되었던 서튼 후에서는 1930년대부터 계속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작업이 이루어졌고, 이곳에서 출토된 문화재들 가운데는 언뜻 보기만해도 눈이 금새 휘둥그레질 정도로 인상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물론 고고학적 발굴로 인해서 획득된 문화재들인 만큼, 이 문화재들의 고고학적 중요도가 매우 높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심지어는 해외 문화재들이라 하더라도 그 전체가 다 약탈 문화재인 것은 아닙니다. 제가 비교적 잘 아는 이집트 유물들만 하더라도, 영국 박물관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수의 이집트 유물을 소장하고 있고 (1위는 역시나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The Grand Egyptian Museum) 그 가운데 상당수는 분명히 약탈 문화재이지만 (예컨대, 로제타 스톤이나 람세스 2세의 거상), 또 상당수의 이집트 유물들은 그 유물이 입수되던 당시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영국으로 반출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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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이 속해져 있는 종교 집단 내에서의 영향력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박진영 정도는 과학에 있어서 어떠한 사회적 공신력도 갖고 있지 못하는 인물이니 그의 개인적인 '과학'에 대한 인식이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미비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홍준은 다릅니다. 그는 한국 내에서는 문화재 관련해서는 최고 전문가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이 방송의 캡춰는 인터넷에서 아주 많이, 아주 널리 유통되었고, 그 과정에서 '영국 박물관 = 약탈 문화재'라는 등식을 머리속에 고정시킨 이들의 숫자도 엄청 많이 늘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일상적 대화 속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분들을에게 제가 어떤 반론을 제기하려고 하면, '어? 아닌데. 유홍준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라며 제 문제제기에 제동을 거는 이들을 저는 꽤 많이 경험했습니다.
만약 유홍준이 잘 모르면서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그건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만약 알면서도 자기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해, 또 방송용 멘트로 저런 말을 한 것이라면, 그건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악행이라 평해도 크게 무리가 없겠죠. 전자와 후자, 어느 쪽이든 매우 해로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