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슈카, <연인>
현대사회는 슬픔이란 감정도 관리해. 처리하려고 들어. 약을 먹고 없애버리려고 하지. 그런 감정은 노동하는데 불리하니깐. 생산성을 위해서는 슬픔이란 감정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단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문화상품이야. 슬픔을 달래주는 위약같은 문화상품에 슬픔은 좋은 재료니깐. 그리고 또 하나 있어. 바로 교양이란 부분이야. 슬픔을 과하지 않게 표현하는 교양은 문명화된 문화인이니깐. 그런 의미에서 현대사회에서 슬픔만큼 깊이 인정받지 못하는 감정도 없어.
그러나 생각해봐. 모든 세상이 재로 변할 것 같은 슬픔이란 감정이 왜 있을까. 그토록 불편한 감정이라면 말야. 아마 그 슬픔 속에서 우린 삶의 체온을 배웠을 거야. 새롭고 자극적인 것만 가치있는 게 아니란 걸 배웠겠지.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체온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을 거야. 어쩌면 슬픔 덕분에 우리 뇌가 발달했는지도 몰라. 우리 뇌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발댈했다고 하잖아.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린과 다른 점은 그거라고 하더군. 사라져 가는 것들을 잡을 수 있는 힘, 현재로 소환하는 힘은 바로 슬픔이야.
그래서 슬픔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해.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현재의 가치가 재로 변한 것을 알고 있어. 에로스로 쌓아 올리고 꼬매고 했던 상징과 의미들이 재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지. 사랑이라는 에로스를 쏟아 부었지만 그 사랑이 지속하지 않을때, 자기 환상의 투여일때, 그리고 자기의 초라함을 느낄 때, 그때 슬픔이 찾아와. 에로스에 가려져 있던 타나토스가 슬며시 살아나. 그리고 없어져 버린 대상으로 흐르지 못한 타나토스는 자기 자신에게 흐르게 되. 그러면서 자기를 공격하게 되는 거야. 표상적 질서에 있던 자기 자신을.
그래서 슬픔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달라져.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페르조나 가면을 쓰고 있던 얼굴은 달라져. 슬픔에 물들어가면서 그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미세근육들이 사용되고 눈물이 나.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해방을 느낄 수 있어. 그동안 에로스로 쌓아올린 것들이 사실은 허상일 수 있다는 거. 그 지점에서 우린 영원을 맛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슬픔은 달콤해. 거기서 다시 에로스가 탄생하기 때문에.
새로운 에로스를 위해서는 타나토스를 거부할 순 없어. 그건 약을 먹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야. 엔터테인먼트 쇼를 본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오는 슬픔을 거부하면, 그 슬픔은 더 큰 에너지로 얼굴을 드러낼 거야. 그러니 조금은 힘들고 조금은 낯설더라도 슬퍼하렴.
알마와 코코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