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은 여전히 베타서비스 중이다. 난 긍정적으로 본다. 그 부족한 부분도 설계의 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진화를 공부해 본 분은 아시겠지만, 진화는 잘 설계된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진화는 주먹구구식이다. 그때 그떄 상황에 최적화된 도구들을 만들어 낸다. 그 모듈들이 합쳐져 멋진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도 그러하다. 생명의 진화에서 눈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면 눈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거리를 두고 파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즉 멀리 있어도 그게 포식자인지 먹이인지 파악하게 해 주는 게 눈이다. 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진화의 선택압에 휼륭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인간의 눈이 어떤 계획적인 설계에 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면 계획 설계를 할 것 같으면 맹점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눈에는 맹점이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만약 계획설계라면 논리상으로 망막 뒤에 혈관과 신경이 있는데 맞다. 그래야 망막에 잡힌 것들을 신경이 뇌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눈에서 신경은 망막 앞에 있다. 이 신경이 망막을 뚫고 뇌로 연결할 때 맹점이 생긴다.그래도 인간 눈은 어쨌든 작용하고 있다. 비록 오징어 눈처럼 맹점이 없이 진화하진 않았지만.
플랫폼에서 베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건 베블런이 말했던 제작본능을 깨우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인간은 무언가를 만드는 제작본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귀찮은 제작보다 소비로 얻어지는 잇점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자신은 충분히 문화를 즐기를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과시적 소비를 하게 된다. 그렇게 얻어진 평판이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왜냐면 사람들은 이렇게 얻어진 평판이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해석하고 그 사람에게 더 끌리기 때문이다. 즉 과시적 소비는 권력을 가져오게 된다. 무엇을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느냐, 얼마나 세련되게 소비할 수 있느냐가 권력인 셈이다. 그러면서 쏠림 현상이 발생한다. 과시적 소비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자본이 많이 있거나 빚이 많이 있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스팀잇에서는 제작본능이 살아난다. 이곳에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도 제작이지만, 플랫폼의 운영에 대한 메타적 고민도 하는 곳이 이곳이다. 모든 걸 운영자가 다 설계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어색할 수도 있다. 또한 어릴 때부터 모든 걸 다 맘마, 빠빠가 해 줘서 자기 욕망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어색할 수도 있다.
어뷰징을 포함한 운영에 대한 토론은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갈등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자세이다. 토론 속에 답이 안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뭐 어떤가. 공화국에 사는 우리 스스로 우리가 사는 공동체 질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자유가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기가 달라졌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화를 위한 선택압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한 눈을 만들어 가는 건 우리 스스로할 일이다.
니체-
"이제 나는 홀로 떠난다. 제자들이여, 그대들 역시 지금 홀로 가야 한다. 나는 그것을 바란다. 그대들에게 충고하느니, 나에게서 떠나가라. 그리고 자라투스트라에 저항하라. 나아가서 그를 부끄러워하라. 아마도 그는 그대로를 속였을지도 모른다.
지혜로운 자는 적들을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친구를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혹자가 선생에 대해 항상 제자로 남는다면 그는 선생에게 나쁘게 보답하는 것이다. 왜 그대는 나의 화관을 잡아채려 하지 않는가> 그내는 나를 숭배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대가 숭배하는 자가 몰락한다면 그대는 어찌하겠는가. 추락하는 동상이 그대를 쳐 죽이지 않겠끔 조심하라.
그대는 아직 자신을 찾지 않았다.
이제 그대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하라. 그대들이 나를 철저히 부정하였을 때만 나는 그대들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