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주의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의식이야 말로 진리를 찾는 대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은 의식이라는 것은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여 시공간의 틀에 놓고 분류합니다. 또한 나를 벗어나서 우주의 한가운데서 조망하는 것같은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식이야 말로, 이성이야 말로 신을 대신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종종 생활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라는 건 이런 이성의 특징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펴보면 의식이란 것이 결코 객관적인 진리를 찾는 도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의식은 욕동의 자극으로부터 자아를 지키기 위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어린 아이는 에로스와 파괴성 등 과잉자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욕동들을 그대로 표현하면 자아가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저 아래 놓아둡니다. 무의식이란 영역에 억압합니다.
'억압의 본질은 어떤 것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여 의식과 거리를 두게 하는 데 있다.' - 프로이트
힘차기 요동치는 그것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두기 위해 의식이라는 장벽을 칩니다. 그러나 의식의 장벽이 취약해진 틈을 타서 무의식의 욕동들은 올라옵니다. 나이트워치는 그 욕동들이 의식세계의 벽을 뚫고 오지 못하도록 막는 임무를 합니다. 그러나 항상 뚤리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 그 욕동들을 막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인간에게 있어 휼륭한 방어기제일 지 모르지만 에너지가 많이 드는 효율성이 낮은 방어기제인 셈입니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논리적인 지배를 하고 사회 규칙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방어기제인 의식을 사용하여 무의식을 억압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은 이 분열에 의해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무의식에는 의식에 통합되지 못한 비논리적이고 비도덕적 관념과 정서, 상처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태적인 게 아니라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의식 표면으로 떠올라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것을 표출합니다.
그런 것들이 표출될 때 우리는 '두려운 낯설음'uncanny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 내부에 있어서 낮익고 친숙한 것이지만 억눌려서 억업되는 것들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강욕구, 항문욕구 등은 원시시대나 유년기에는 익숙한 욕동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자아의 생존을 위해 초자아에 의해 억압되면서 배척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억압은 현실에 부적합한 욕동을 영원히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단시 의식에 나타나지 않도록 할 뿐입니다.
오히려 억압할 경우 그 충동에 고착되기 쉽습니다. [즉 항문기에 고착되어 도덕적으로 완벽하나 인색한 각하처럼].
억압은 역으로 억압된 무의식의 회귀를 야기합니다. 의식의 방어작용이 강하다는 것은 무의식이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어떤 충동을 억지로 참으려 하면 더 큰 충동에 끌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이성주의의 풍조에서는 사유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사실 사유는 나르시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자기 말만하면 모든 것이 다 이뤄졌을 때의 자아전능감이 사유로 표출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방어막에 불과합니다. 강한 전능감 뒤에는 강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장이란 이제는 더이상 필요 없어진 방어막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