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이 없는 모자를 쓴 카미유 클로델
로댕은 카미유와 헤어진 다음에도 이 조각상을 계속 만들었다고 해. 이 조각상에서 스며나오는 빛. 그건 로댕만이 감지할 수 있었던 빛이라고 미술평론가인 이주헌 선생님은 말해. 말을 한번 들어볼까.
<챙이 없는 모자를 쓴 카미유 클로델>은 작은 조각이지만, 클로델 특유의 신비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작고 갸름한 얼굴은 그 안에서 빛이 고요히 비쳐 나오는 듯하다. 그렇게 환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어둡지도 않은 빛, 그러나 클로델 외에는 그 어떤 사람도 자아낼 수 없는 빛이다. 그 빛은 로댕의 전 존재를 끌어안았던 빛이요 클로델 자신을 태워 온전히 소진한 빛이다.
어때 멋지지.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는 빛이라니 말야. 빛은 색체나 형태보다 보다 더 무의식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 의식으로 올라오지 않는 움직이는 진동의 느낌, 그게 빛이 아닐까. 그리고 그 빛이 만들어내는 건 시간의 비실재성이지. 왜냐면 시간이라는 건 우리가 세계를 해석할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야. 즉 시간은 사건을 해석하는 도구일 뿐이야. 차이를 해석하는 도구.
시간이 실재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실재할 뿐이야. 화이트헤드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합생concrescence일 뿐이야. 양자역학에서도 우리가 보는 건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해석일뿐이라고 하잖아. 같은 거야. 해석이라는 사건이 있을 뿐이야. 시간은 그 해석의 방법이고. 사람의 마음에서 알수 있는 존재의 특성은 모두 살아있다는 거야. 살아있는 존재들이 사건이라는 선택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게 세상이라는 거지.
로댕이 저 두상을 만들때, 외면적인 표상만 만들지는 않았어. 로댕은 자기 마음 속에서 감지한 그 빛을 끊임없이 합생한 거지. 만들어낸 거지. 무시간적인 그 빛. 시간이 지날 수록 더 깊어지는 그 빛. 빛의 속도를 따라가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하지. 너는 어떤 시간을 살아가니? 시간의 흐름이 늦어진 경험은 있니? 지루한 그런 거 말고 의미로 충만해서 느려지는. 그런 경험의 순간을 좀 늘려봐. 삶을 두번, 세번, 네번, 아홉번 사는 계기가 될 거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의 흐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삶에서 자기결정권을 갖는 것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