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기를 마시고 있는 현대문명의 대표 명령은, '즐겨라'이다. 즐기지 못하면 현대인이 아니다. 심지어 종교조차도 쾌락을 명령한다. 고난을 받더라도 긍정적으로 즐기라고 한다. 그래야 더 큰 즐거움이 온다고.
경제학의 효율도 마찬가지다. 이기적 이익을 쫒는 인간의 합리성은 결국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쾌락을 최대화 하는 것이 경제적 투자의 관점이다. 개인 이익은 즐거움의 최대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즐거움을 위해서는 자기를 협오하는 즐거움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경제 시스템에 사는 사람들은 조울증에 걸려 있기 쉽상이다. 환경이 사람의 감정을 낳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들은 정작 크게 즐거워할 때야 말로 즐거워하지 못한다. 과분한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과분한 보상은 질투를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물러난다.
즉 우리는 부정적인 일을 피할 뿐 아니라 긍정적인 일도 피한다. 과한 쾌락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일에 트라우마라는 말로 상처를 표현하듯이 긍정적인 일에도 트라우마라는 일로 표현할 수 있다.
최근 1년 동안 놀라운 상승을 한 암호화폐에서도 우리는 그 트라우마를 볼 수 있다. 과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것은 불공정하다는 뭔가 모를 죄의식. 그게 우리의 트라우마며 우리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년이 사랑하는 소녀와 마침내 사랑을 이루게 되었을 때, 자신은 그 사랑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물러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원인은 외부에 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은 자기 보존의 습성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을 유지해왔던 습성에서 벗어나기 두려워하므로 그 습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벌은 더 큰 쾌락을 경험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굉장히 경제적인 투자방법이다.
경제적으로 쾌락은 한꺼번에 경험되면 안된다. 그건 언제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쾌락의 관리. 따라서 더 큰 쾌락은 현실의 원칙에 따라 조절되어야 하며 더 큰 쾌락을 얻기 이전에 나와야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다. 자기 습성에서 벗어난 죽음으로 인해서만 발생하는 쥬이상스에 대한 방어기제.
작은 쾌락은 더 큰 쥬이상스의 방어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