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만지고 냄새맡고 혹은 측정가능한 것만 객관성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것만 객관적이라고 하는 건 감각의 오류지. 감각주의에 우리를 내어줄 순 없잖아. 객관성이란 어떤 양태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가능할 때를 말할 거야. 따라서 어떤 인식의 틀을 객관화한다는 것도 성립할 수 있어. 즉 존재는 무엇가를 인식함으로써 존재하는데, 그 인식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충분히 객관적일 수 있다는 거지.
객관화함으로써 주어지는 이점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객관화를 하면 우리가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 즉 인식의 한 방법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그게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알수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었구나 하고 아는 거야.
그럼 우리의 인식 저변에 있는 가장 큰 틀은 무엇일까. 아마도 시간이 아닐까. 그것도 선형적 시간.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인식의 틀은, 시간이 과거에서 흘러서 현재에 이르렀고 미래로 흐른다는 선형적 시간개념일거야. 그 개념이 진보에 대한 희망을 낳았어. 그러나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알겠지만 앞서고 뒤서고 하는 순서를 낳았으니깐. 어느 하나의 목적을 두고 그 목적에 도달했느냐에 따라 위계를 나누는 게 선형적 시간 인식이야. 그 인식 때문에 우리는 신에게 다가가는 정도에 따라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어. 물질적 부라는 물신에 얼마나 도달하느냐에 따라 우리 위치가 객관적으로 정해지기도 해.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야. 많이 소비되는 낭만적 사랑이란 감정을 예를 들면 하나된 합일감이라는 목표 아래 우리 사랑의 정도를 가늠하기도 하지. 사실은 만들어진 감정이고 자본이 증폭시킨 감정일 뿐인데 말야.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서로에 대한 가해적-피학적 자극적 기생관계인데 말야.
선형적 시간인식이 문제라는 거지. 이게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자체를 결정할 때, 그게 독이 되는거야. 우리 존재를 헐떡거리게 하는 독이 되는 거야. 잠시 머물러 보자. 그러면 알 거야. 잠시 밖에서 우리를 보자. 그러면 우리 존재가 선형적 시간이라는 호흡기에 매달려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걸 알게 될 거야. 불쌍하잖아.
우린 충분히 달리 살 수 있거든.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충분히 원형적 시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어. 가장 과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원형적 시간론을 말하잖아. 양자역학에서도 관찰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론을 말하고 있고. 잠시 멈추다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어. 그 알음알이가 우리 삶을 좀더 경쾌하게 할 거야. 존 멈춤, 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