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 보면, 무용의 용(無用之用)이란 말이 나옵니다. 쓸모 없는 것이 더 쓸모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날 목수가 큰 나무 옆을 지나가 됩니다. 그 나무는 반듯하게 자라지 못하고 비뚤 비뚤하게 자라 있습니다. 목수는 한탄을 합니다. 똑바로 자랐으면 큰 건물의 재료가 될 터인데, 비뚤 비뚤 자라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날 밤 목수는 꿈을 꾸게 됩니다. 나무가 나타나서 목수에게 말합니다. 자네는 나를 보고 쓸모가 없다고 했지만, 난 비뚤 비뚤 자란 덕분에 다른 나무들보다 오래살게 되었다네. 생명을 기르게 되었다네.
양생을 말합니다. 양생은 언뜻 보기에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나옵니다.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쓸모 있음이 되기 위해 오히려 몸을 쓰면 생명과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근육이 편벽되게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은 이야기로는 막에 대한 느낌이 소실되며 기에 대한 느낌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여하튼 당장의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만큼 편벽에 치우쳐야 됩니다. 그리고 이는 생명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양생이란 단지 삶을 길게 하는 걸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보다 깊은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타자의 욕망에 의해 당장 쓰임받는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삶을 말합니다. 중심을 지키는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좀더 긴 호흡을 가져야 됩니다.
피아노 연주에서 손가락과 건반이 부딪치는 음은 잡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잡음이 음색에 결정적이라고 합니다. 무용의 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