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유광지숙전이란 보이차를 마십니다. 자사호에 물을 따릅니다. 가득 딸진 않습니다. 위에 빈 공간을 조금 남겨 둡니다. 그렇게 하면 그 공간 안에 보이차의 향이 모이게 됩니다. 향과 더불어 신화도 떠오릅니다. 오늘 들려들릴 신화는 다나에입니다.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의 어머니이자, 아르고스왕 아크레시우스의 딸입니다. 아크레시우스는 손자가 자신을 해할 것이란 꿈을 꿉니다. 그래서 다나에를 높은 탑에 가둡니다. 그러나 신의 왕 제우스는 황금 빛물로 변해 다나에게 찾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페르세우스입니다.
아버지 아크레시우스는 왕입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물러나길 거부하는 왕입니다. 고대에는 힘이 다한 왕은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기근이 들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는 흉한 일들이 생겨납니다. 왜냐면 왕의 생명력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주술적 사고를 가진 그들은, 시들은 왕은 곧 나라의 생명이 위축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왕은 곧 생명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은 물러나길 거부하고 자신의 탑 안에 다나에를 가둡니다. 다나에는 생명을 뜻합니다. 봄의 생명력 같은 처녀의 생명력입니다. 탑은 자신의 명예입니다. 자신의 명예 속에, 자신의 통제력 속에 가둡니다. 탑은 그래서 남근을 상징합니다.
폭군 아버지에 의해 갇혀진 딸은 과잉억압을 받습니다. 생명력이 강하게 억압되어 표출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면 생명력은 증상으로 표출되기 십상입니다. 그렇게 하는 아버지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경험했던 남자의 표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이외의 대상을 자기 통제 아래 놓고 마음대로 하려 했던 권력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권력에 취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에 둔갑합니다. 그만큼 권력은 중독적이며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한다는 어느 뇌과학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생명은 그냥 억압당해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의식(아버지)의 억압이 있더라도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그게 제우스의 황금 비와 만나는 부분입니다. 황금비로 표현된 것은 리비도의 표출에 대한 은유입니다. 직접 표출하면 의식의 감시를 받게 되므로 우회해서 표현됩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그 황금비와 만나는 다나에를 그린 것입니다.
부족사회를 연구한 모스는 경제론이 떠오릅니다. 부족에서 가장 힘이 강한 사람은 선물을 많이 주는 사람입니다. 이를 포틀래치라고 합니다. 부족에게 있어서 강한 사람은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족을 위해 많이 베푸는 사람입니다. 다나에의 아버지는 많이 베풀기 보다 자기의 탑 안에 공동체의 생명력을 가두려 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그 속에 억압되어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서로 만나 꽃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