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표현불감증이란 게 있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거죠. 왜냐면 그렇게 감정을 표현해도 자신이 안전해지고 자기 통제권을 갖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을 떄, 그 사건에 대응하는 투쟁과 도피 반응을 합니다. 이 과정 중에서 여러 감정들이 동원됩니다. 그러나 그 감정의 동원이 에너지소비만 있고 유효하지 않은 경험을 한다면, 우리 심리신체는 차라리 무감각해져 버립니다. 생존에 유효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얼어붙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즉 한번의 사건으로 끝나면 되는데, 일상을 종종 침범합니다. 앤디 워홀의 모나리자 처럼 발이죠. 즉 계속 반복되는 이미지 속에서 맥락은 의미를 잃고 맙니다. 그처럼 트라우마는 죽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맥락을 흐트러 버리고 탈맥락화해 버립니다. 일상은 무감각해지고 건조해집니다.
일상에서 주변사람들과 정서적 친밀감이 없어져 버립니다. 대신 강력한 자극을 쫒게 됩니다. 그게 살아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 상황이 발생할 떄 이를 해결하는 건, 이성적인 통제가 아닙니다. 왜냐면 계획과 판단을 배외측 전전두피질이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약하기 떄문입니다. 오히려 배내측전전두피질의 소통력에 기댈 필요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보통 신체의 생리적 변화를 수반합니다. 따라서 평소에 안전한 곳에서 자신의 신체 생리적 상태를 모니터링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작해 봅니다. 통제권을 갖는 것입니다. 감각을 조작하고 생리적 변화를 만들어 내고 하는 등으로요. 그렇게 하나 하나 잃어버렸던 통제권과 감각을 살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원들이 쌓이고 쌓이고, 학습이 되면 더 이상 트라우마 상황에 얼어붙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대응할 수 있는 자원이 충분해지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단지 심리적 측면만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몸하고 분리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니깐요. 또한 약으로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존엄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