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 - 최선규 MC의 추억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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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후배한테 이 얘기를 해 준 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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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Starter라는 말이 있습니다. 발동이 지극히 늦게 걸리는 사람을 말하죠. 물론 아예 안 걸리는 사람보다는 낫겠습니다만 대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일을 시작할 때 왜 이렇게 어벙하냐 둔하냐 민하냐 갑갑하냐 답답하냐 바보같냐 멍청하냐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의 질문을 받기 일쑤입니다. 바로 제가 그랬습니다. 참고로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하던 저는 중학교 때 작심하고 젓가락질을 올바르게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는데 당시 젓가락을 약지로 지탱하는 걸 익히는데 사흘이 걸렸습니다. 뭔가 간단한 느낌을 터득한 뒤엔 도대체 그전엔 왜 못했는지가 이해가 안 갈 정도였지만 그 ‘간단한’ 느낌까지 3일이 소요됐던 겁니다.

뭐든 그렇습니다. 끝내 배우지 못한 스케이트와 스키도 그럴 겁니다. 몇 번 강습도 받아 봤지만 그냥 이런 건 포기하는 게 내게 더 행복하리라는 생각으로 때려치웠죠. 그것도 이 악물고 더 버텼으면 “내가 왜 이걸 못했지?”하면서 유유자적 타고 있을 거라고 자위하기도 합니다만 결국 못했습지요.

젓가락질이나 스케이트 못타는 것이야 웃어 넘길 수도 있는데 먹고사니즘의 포로가 된 다음 일을 빨리 배우지 못하는 건 참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빠릿빠릿한 동기들은 이미 숙련된 조교가 된 지 오래고 때로는 선배들도 경탄해 마지않는 감각과 능력을 수시로 선보이는데 저는 허구헌날 욕을 들어 처먹는 것이 일과였고, “아차!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고 “안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를 흥얼거리는 게 진종일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촬영을 할 때 선배는 빌딩 5층에서 지휘를 하고 저는 길거리에서 배우들에게 큐 사인을 주고 있었는데 옥상에서 선배가 저를 부르더니 뭐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두어 번 안들립니다 소리를 질렀는데 옥상 난간에서 선배 모습이 사라지자 선배가 화난 줄 알고 5층 계단을 폭풍같이 뛰어올라갔죠.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더운 여름이었고 단 몇 분이었지만 계단을 두 발로 날아오른 저는 샤워한 것처럼 젖어 있었습니다. 그 몰골을 보고 선배가 의아하게 묻습니다.

“너 왜 올라왔냐.”
“부르시지 않았어요? 뭐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아서.... 잘 못들어서”
“너 뒤에 찬 게 뭐냐.”
“워키토키네요.”
“그걸 차고서 지금 뛰어 올라왔니? ”

어느 날 선배 한 명은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내 나름대로는 고민하고 하는 소리니까 고깝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라. 내 생각에는 너는 이 직업이 안 맞고, 네가 이 일을 더 하면 더 할수록 네 인생의 낭비 같다. 나중에 후회할 거 걱정해서 하는 소리다. 선배로서 이런 얘기 안하려고 했지만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한다.”

물론 저는 마음 속으로 선배에게 이렇게 반발했습니다. “니가 월급주냐 씁새야?” 하지만 그 반발 뒤켠으로 스멀스멀 돋아나는 자괴감은 그 열 배는 컸지요. 정말 나는 안되나 보다. 저 말대로 더 후회하기 전에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하나. 나는 왜 이럴까. 이 일이 나를 거부하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죠. 그러다보니 얼굴에도 티가 났고 어깨도 늘어져 있었나 봅니다. 어느 날 녹화가 끝난 뒤 MC가 부릅니다. “야 너 무슨 일 있냐.” 대화를 할려면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팠던 최선규씨였죠.

MC더러 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데도 마땅찮은 터라 주저리주저리 푸념을 늘어 놨습니다. 그러자 최선규씨가 자세를 고치고 저를 가까이 앉히더군요. 나직하게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야 내가 지금은 그래도 잘 팔리는 MC잖냐. 대한민국에서 나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많은 사람 아니냐. 하지만 내가 KBS 처음 들어갔을 때 무슨 말 들었는지 아냐?”

당시 최선규씨는 A급 진행자였습니다. 무슨 프로그램을 하게 되면 항상 MC 물망에 오르는 양반이었고 능숙한 진행으로 샤프한 이미지와 따뜻한 느낌을 함께 발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MC였지요. 이런 분이라면 될성 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 다음 말은 천만 뜻밖이었습니다.

“한 선배가 나보고 그러더라. 저런 새끼들이 들어와서 KBS 아나운서실 물이 흐려지는 거라고. 그 말을 내 면전에서 하더라고. 아나운서 발음들 좀 또박또박이냐? 아주 딱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 얘기를 하는데 정말 죽이고 싶더라고. 또 죽고 싶기도 하고. 이 말 듣고 내가 계속 여기 있어야 되나 싶기도 하고.”

너무나도 놀라운 고백(?)에 눈을 화등잔만큼 떴습니다. 진짜요? 입이 헤 벌어지더군요. 최선규씨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잘나가던 동기들 다 어디로 가고 내가 이 길 한복판에 서 있더라고. 형민아.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 알지? 나무가 굽고 곧고는 문제가 아냐. 빨리 자라고 늦게 자라고는 아무것도 아냐. 단지 네 선산인가가 중요해. 이 일이 네게 맞는가 안맞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네가 이 일을 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만 생각해.”

그리고는 벌떡 일어서서 나갔는데 안그래도 큰 키가 천정에 닿을 듯이 커 보이더군요. 뒤통수에 대고 좀 큰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했는데 오른손을 들어서 답례하던 모습까지도 눈에 생생합니다. 기운을 차린다는 말을 그때 실감을 했습니다. 주먹이 저절로 쥐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입술은 미소로 열리고 어금니는 으드득 깨물립니다. 텅 빈 분장실을 혼자 왔다갔다 하면서 저는 까닭 모를 욕설성 감탄사를 되풀이 했었지요. “시발! 조또! 확 마..... ” 하지만 그 욕설은 욕설이 아니었던 기억이 납니다.

살아가면서 고마운 사람이 한 두 명이겠습니까마는 오늘 고마운 사람 얘길 해 보라는 숙제를 하러 점심 거르고 모니터 앞에 앉자마자 그 양반의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환한 미소가 문득 떠올라서 단숨에 그날을 떠올려 봅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싹수 노랬던 떡잎 하나는 아직까지는 선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목도 아니고 중목도 못되지만 그래도 뿌리는 뽑히지 않았다는 게 어디겠습니까.

저한테나 선배들한테 깨지고 우거지상이 돼 있는 후배들, 가끔 제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어깨 늘어뜨리는 PD들에게 저는 이 얘기를 해 주곤 합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 곧고 굽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 선산이 네 선산인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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