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 3일 "세계를 뒤흔든 계란"
1991년 4월 강경대가 죽었고 그 뒤 1주일이 멀다 하고 꽃다운 생명들이 제 몸에 불을 그어 죽어갔고,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 끝에 여대생이 질식사하는 끔찍한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강경파 총리로 원성의 대상이 됐던 노재봉 (광주사태는 김대중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 때문에 일어났다던 바로 그 인간)을 경질하기로 했는데 그 후임은 다름아닌 전교조 1500 교사의 목을 잘랐던 '망나니' 정원식이었다.
5월 24일 총리 서리로 임명되었지만 그는 이전부터 출강해 오던 외국어대 대학원 강의를 계속했고, 6월 3일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정원식 총리가 외대에 왔다는 소식이 들리자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정원식 총리에게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분노를 폭발시킨 학생들은 대부분 저학년들이었다. 89년 전교조 대학살을 경험한 그들은 "나는 그 해 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는 기세로 정원식을 분장한 삐에로로 만들어 버렸다.
다음날 신문을 받아들고서 처음에는 크게 웃다가 1분 뒤 확연하게 심각해졌던 기억이 난다. 계란과 밀가루가 폭력적인 수단은 아니라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는 일국의 총리의 사진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외국어대는 쑥밭이 됐다. 수십 명이 수배됐고 잡혀 온 사람들에게 검찰은 살인범에게나 허용될 징역 7년을 구형하는 등 살기마저 띠었다. 언론은 정 총리의 봉변을 생생히 중계하며 학생들의 폭력성과 무례함과 비인간성을 연일 강조해 댔다.
주말만 되면 거리를 메우던 시위대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강경대 이후 이어지던 죽음의 항거는 금새 잊혀졌다. 그리고 이후 실시된 광역 선거에서 민자당은 완승을 거두었다. 6월 항쟁의 재판이라는 91년 5월은 그것으로 끝났다. "세계를 뒤흔든 계란"이었다. 학생들의 분노는 십분 이해하고, 그들의 명예도 이미 회복되었지만, 나는 그때 학생들의 행동을 칭찬해 주지는 못하겠다. 더구나 외대 총학생회장이 사건 다음 날 써붙였던 대자보를 다시 보면 한숨 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제의 투쟁에서 우리 애국외대는 전국의 백만학도와 4천만 민중에게 청량제와 같은 통쾌감을 주었습니다. 7천3백여 애국외대 청년학도들을 대표하는 저는 어제(6.3)의 투쟁에서 우리 외대인이 보여준 그 기상과 의지를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제 학교를 빠져나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면서 시민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도 통쾌하다’ ‘잘했다’ ‘역시 외대는 외대다’.”
바로 이런 '순수한' 사람들의 '혁명적 낙관주의' 덕에 보았던 피는 나일 강보다도 길고 깊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