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쁜 6.25 최초의 세계 챔피언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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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6월 25일 가장 기쁜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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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는 /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 물에 젖은 꿈이 /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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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인 김동환의 시 <북청 물장수>다. 일제 강점기 상수도 시설이 여의치 않던 경성부내에서 물을 날라 주던 물장수들은 유독 함경남도 북청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함경도 아저씨들은 서울 장안의 아낙네들이 눈 부비며 일어나 밥을 하기 전에 그 물을 대야 했으므로 아마도 가장 빨리 눈을 뜨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그들의 생활력은 역시 함경도 출신인 파인 김동환에게 영감을 줬고, 시인은 그들의 삶을 이렇게 뻐근한 시어로 남겨 놓게 된다. 이 북청의 후예 가운데 하나가 1966년 6월 25일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사건 하나를 저지른다. 이름은 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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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에서 뼈가 굵을 운명이 아니었다. 그는 1939년생, 우리 아버지와 동갑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 이틀 전에 김기수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유복자였고, 열 한 살 때 터진 전쟁으로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를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흘러든 곳이 전라도 여수였다. 한 번 대한민국 전도를 봐 보시라. 함경도 북청에서 전라도 여수가 어디인가를. 전쟁은 그렇게 한반도를 크게 휘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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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는 거기서 복싱을 배웠고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아마튜어 복서로서 그는 연전연승이었다. 그는 한다하는 아마튜어 복서들을 제치고 1960년 로마 올림픽 대표선수가 된다. 이 로마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사에서는 악몽같은 대회였다. 1948년 정부 수립이 될락말락하던 시기에 나간 대표팀도 동메달은 거머쥐고 왔건만 이 대회에서는 단 한 개의 메달도 따지 못한 것이다. 동메달 하나조차 없었다.

유망한 메달리스트였던 김기수는 홈팀 이탈리아의 미남 복서 니노 벤베누티에게 덜미를 잡힌다. 홈팀의 어드밴티지가 적용됐던 것일까, 김기수는 판정에 불만을 터뜨리며 링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벤베누티는 홈 어드밴티지를 이용한 찌질이와는 거리가 먼 선수로서 이후 프로로 전향해서도 주니어 미들급과 미들급을 쥐락펴락했던 전설적인 복서였다. 어쨌든 1패를 안은 김기수는 프로로 전향했고 벤베누티도 프로로 돌았다. 그리고 김기수가 동양 챔피언일 때 벤베누티는 세계 챔피언이었다. 얄궂게도 김기수는 또 한 번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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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전 포철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회장을 불러설랑 “임자 우리도 세계 챔피언 한 번 만들어 보자.”고 했고 그 명을 받들어 훈련에 전념할 체육관을 지어주고 각종 지워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외국인 코치도 붙여 주어 트레이닝시켰다고 하니 보탤 말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언감생심 이탈리아 현지에 가서 챔피언을 따 오다는 것은 김기수의 경험이 보여주듯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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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베누티를 불러들이자! 그런데 벤베누티는 수만 불의 대전료를 요구했다. 국민소득 200불이던 시절,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경기를 위해 수만불의 대전료를 지불하고도 배가 아프지 않은 한국인은 없었을 것이다. 경제기획원부터 단호했다. 절대로 안된다!!!! 하지만 해결사가 있었다. 그것은 또 ‘각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가 보증을 서서 문제의 파이트머니를 만들어 주었고, 차지철 등 각하의 심기경호에 열중하는 이들은 이 타이틀전 쟁취의 책임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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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도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 링사이드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가운데 김기수는 히트 앤 클린치 작전을 적절히 구사하며 테크닉 좋은 벤베누티의 발을 묶었다. 결과는 2대1 판정승이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그는 시원스런 복싱은 보여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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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차 방어전 프레디 리틀과의 경기는 완전히 진 경기였고, 3차방어전은 "타이틀 팔러 간다"는 욕을 들어먹으면서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 타이틀을 빼앗긴다. 사람들은 급속도로 그로부터 돌아선다. 급기야 가지고 있던 동양 타이틀마저 일본 선수에게 빼앗겼을 때 그는 김포공항에서 계란 세례를 맞고 만다. 학교에서 왜놈한테 깨진 김기수 딸이라고 놀림받아 부아가 치민 딸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기수는 또 한 번 북청 기질을 발휘한다. 절치부심한 끝에 자신을 이긴 일본 선수에게 도전, 승리를 거두고야 은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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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밀물과 썰물같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그의 처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일까. 그는 '매맞아 번' 돈을 튼튼하게 지켜낸다. 몇몇 이들 외에는 친한 친구도 드물었고, 구두쇠로 통할만큼 짠돌이 노릇을 했다. 그 스스로 '삼팔 따라지'라 자조적으로 일컬었던 그가 21세기 한국에서조차 '근본 없는'이라는 형용사가 운위되는 한국에서 버텨 내려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흔히들 이북 사람들이 생활력 강하다고 하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생활력이 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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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친한 친구였고 역시 이른바 '삼팔따라지'의 하나였던 김응룡 감독의 일화를 봐도 그렇다. 광주에서 김기수와 김응룡이 술을 먹는데 한 취객이 "누구는 장인 잘 둬서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건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 이상윤을 두고 한 소리였다. 이상윤이 김기수의 사위였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김응룡은 다시는 김기수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김기수 역시 그를 서운해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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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타인의 시선에 날들을 세우고 살아야 했던 팔자였지만 김기수는 구두쇠라는 명성 아래 또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의 경제적 도움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이들이 꽤 됐다는 후문이고, 자기 집에 공사차 온 노동자가 복서의 꿈을 키운다는 말을 듣고는 덥석 봉투를 내민 일도 있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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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북청에서 나고 전라도 여수에서 자란 한 청년이 1966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터진 날, 그 슬픔을 잊는 승리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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