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 13일 가수여 잘 자라 - 현인 별세
일제 강점기 시절 그만큼 팔자가 좋은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스탠더드 석유 회사 직원 노릇도 하고 마이니찌 신문 기자도 할 정도의 인텔리였던 바, 일점 아쉬움도 부족함도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젊은이 자신도 다재다능했다. 후일 대여섯 개의 외국어를 능숙히 구사할 만큼 머리도 좋았고 학교 배구 선수로 발탁될만큼 운동 신경도 걸출한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물론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면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일본인 여인과 재혼을 하는 등 가정환경의 변화 속에서 젊은이는 육사의 꿈을 접고 음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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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음악 학교라 할 우에노 음악 학교에 입학하지만 아버지는 기대를 저버린 아들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학비를 일절 보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역시 그런다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팔자가 아니었다. 고학을 하면서 학교를 졸업했지만 당장 그를 모셔가려는 축은 아무도 없었다. 성악 교수를 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는 포연처럼 사라졌고 악극단원이 되어 새 인생을 살아야 했다. 막바지에 다다른 일본의 발악적인 징용을 피하기 위해 서해 바다 건너 상해로 피신, 그곳에서 가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본명 현동주 예명은 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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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귀국한 그에게 하나의 전기가 된 노래는 <신라의 달밤>이었다. 신라의 바바바바바밤이여~~~ 하고 요즘도 곧잘 익살스런 유머의 대상이 되는 그 노래. “1947년 고려영화협회는 해방 후 최초의 영화 '자유만세'를 명동 시공관에 올렸다. 현인이 소속된 악단을 초청한 것은 관객 끌기 수법이었다. 바로 여기서 불후의 '신라의 달밤'이 발표됐던 것이다. 민족 해방을 감동적으로 그렸던 영화가 끝나자 현인의 노래 순서가 왔다.” (주간한국 추억의 LP- 현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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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른 신라의 달밤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관중들의 엉덩이를 찌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격동시켰다. 호소력있는 목소리에 듣는 이의 몸도 떨려나올 듯한 바이브레이션과 그에 걸맞게 잘생긴 외모 앞에서 관중들은 열광했다. 기립박수가 터져나왔고 앙코르는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됐다. 현인은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됐다. <비내리는 고모령>도 대히트였고 <고향 만리>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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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노래를 중단한다. 자신의 뜻에 항상 반대였던 아버지였지만 해방과 귀국 이후 아버지를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불효자로서는 그 죽음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던 그를 도닥여 다시 무대에 서게 한 사람이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었다.
그리고 당시를 살았던 모든 한국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는 한국전쟁이 터진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현인은 자기 집 다락방과 시골을 전전하며 납북을 피한다. 그렇게 악전고투의 인공 치하와 국군의 반격을 겪으면서 그는 이후 그의 노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명곡을 노래하게 된다. <전우여 잘 자라>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던 날 이 노래의 작사자 유호는 청파동 언덕빼기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거침없이 한강변으로 내달리는 것이 보였고 한강 다리는 이미 끊겼다. 그때 불쑥 한 국군 병사가 나타났다. 철모도 없고 흙투성이 헝겊 군화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으나 서울을 지키지 못한 군인의 분노만큼은 이글거리며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총알이 떨어지자 총을 팽개치고 효창공원 언덕길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석 달 뒤 서울 탈환을 한 후 유호는 그 병사를 기억하며 감회를 가사로 적었고 시골로 몸을 피했다가 나타난 작곡가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현인 특유의 창법과 어우러진 이 노래 역시 빅히트였다.
소설 <태백산맥>에 보면 빨치산들이 이 노래 가사를 바꿔서 “반동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그만큼 전쟁 중 이 노래의 호소력은 컸다. 단순한 사기앙양용 노래가 아니라 전쟁의 슬픔과 ‘사라진 전우’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담긴 노래였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모습이 꽃같이 별같이”
심지어 이 노래는 4.19 때 동료를 경찰의 총에 잃은 학생들이 눈물로 부른 노래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경무대로 경무대로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1.4 후퇴를 겪고 일진일퇴의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무렵, 또 하나의 현인의 노래가 탄생한다. 대구의 오리엔트 레코드사 문예부장 직함을 갖고 대구에서 살던 박시춘에게 친구 강사랑이 가사 하나를 디밀었다. 대구 시내에 넘쳐나던 피란민들의 비참한 몰골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라 적은 가사라는 것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음 이거 좋은데?
박시춘 역시 감이 왔다. 당장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단 하루만에 완성을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그것은 작사가 강사랑의 사상 문제(?)였다. 강사랑의 처남이 1948년 여순 사건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즉 그런 빨갱이의 친척이 만든 가사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특무부대장의 호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 그 오지랖 넓은 특무대장이 다른 곳으로 전출되면서 이 노래는 레코드로 찍어낼 수 있었다. 역시 가수는 현인이었다.
일제 때부터 그 우람한 교각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볼거리를 제공하여 부산의 명물이었던 영도다리. 많은 피난민들은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보기요!” “무됴건 영도다리로 오라. 알갔네?” “영도다리만 기억해 응 영도다리만!” 를 되풀이하며 자식들에게 가족들에게 “영도다리”를 주입시켰고 실제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영도다리에서 가족을 찾아 서성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가수 현인의 고향이기도 한 영도는 이미 피난민들의 움막집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고달픈 피난 생활 속에서 애인인지 동생인지 모를 금순이를 찾는 애절한 가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정도가 아니라 파고들어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돼 버렸다.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 보자.”는 노래는 당시 영도 다리를 오가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노래가 아니라 그냥 울부짖음이었다. 현인의 노래는 그 울부짖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내로라 하는 천하의 현인이 패배를 인정한 사람이 남인수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또한 전쟁통의 수천만을 들었다 놨다 했던 불세출의 가수. 1959년 예전의 ‘나가수’같은 두 톱스타 가수의 대결이 벌어졌다고 한다. 문화일보에 실린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에 따르면 남인수의 응원단장은 막둥이 구봉서가 맡고, 현인의 응원단장은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나서서는 이 두 가수가 번갈아 부르면서 일대 ‘대결’을 벌이는 장관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인수가 “낙화유수”를 부르면서 남인수 우세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후일 정두수에게 현인이 “그 양반을 도저히 못 당하겠더란 말이야. 정말 타고난 가수야. 백년에 한 번 탄생하기 힘들다는 불세출(不世出)의 가수 말이야. 어찌나 잘 부르던지….”라고 토로했다고 하니 (위 기사 중) 현인도 그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 셈이다.
스포츠월드 사진
그 뒤로도 현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파산하여 전재산을 들어먹기도 하고 결혼도 세 번씩이나 했다. 하지만 1991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신곡을 발표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2000년까지도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할 정도로 건강한 그였지만 당뇨가 도진 이후에는 그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고 구봉서 등 절친한 동료 후배들의 방문도 사절할만큼 조용히 살다가 2002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노래로 위로를 받았던 수많은 금순이들과 금돌이들의 애도를 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