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6월 30일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 시작
왕년의 KBS 프로그램 진행자 가운데 유철종이라는 분이 계셨다. <독점 여성들의 9시>라든가 <스튜디오 830> 등 인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구수한 말맛과 깔끔한 진행으로 인기를 끌던 인기 M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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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30주년이었던 터라, 향용 하던대로 6.25특집들이 줄을 지어 제작되는 가운데 유철종씨는 이지연 아나운서와 콤비를 이루어 90분 특집 프로그램 하나를 맡게 됐다. 제목은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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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단은 6월 21일 방송된 <스튜디오 830>이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아직도 내 가족을 못찾았오’라는 타이틀의 6.25특집 기획물을 방송했고, 출연자 섭외 과정에서 이산가족들의 한맺힌 사연들이 공개되면서 KBS의 방송쟁이들의 머리 속에는 판을 좀 키워 보자는 생각이 떠올랐고 (이 아이디어의 주인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던데) 그것이 6월 30일의 생방송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날 이후 KBS는 뒤늦게 몰아닥친 전쟁의 후폭풍에 휘말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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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의 전화가 쏟아졌다. 시쳇말로 대박의 조짐이었다. KBS는 이날 생방송을 세 시간 연장하는 결단을 내리지만 그 정도로 마무리될 사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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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이산가족의 사태에 휩쓸렸고 특별생방송은 몇 시간 연장 차원이 아니라 장장 138일 동안이나 계속된다. 이 시간 동안 거의 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중단됐는데 이 방송이 끝나던 날 김동건 아나운서가 “그 동안 항의 한 건 없었다.”고 자랑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바, 별다른 불만도 제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전쟁 때 참전했던 이들조차 아직 환갑에 이르지도 못했을 때였고, 그 아픔들을 선연히 간직한 채 생존을 위해 아금바금 달려왔고, 아직 멈추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런 차에 전국 방송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이산가족찾기’를 벌이니 그 감정의 물꼬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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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인간의 아픔,슬픔,감동,기쁨이 버무려지고 뒤섞인 채 안방에 배달됐다. 어떻게 하든 국민들의 마음을 ‘총화’시키고 싶어하던 5공 정권으로서야 이만한 호재가 없었다. 연쇄살인범 뉴스로 용산 참사 소식을 덮으려 했던 이명박 정부에 비하면야 폼이 나도 이만저만 나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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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누가 그 감동의 퍼레이드에 이의를 제기했겠는가. 제주와 서울, 강릉과 광주, 부산과 대전을 연결하는 반으로 나뉜 화면에서 서로 어색해 하던 이들이 퍼즐을 맞추든 자신들의 과거를 확인해 가다가 “맞아 맞아!”를 부르짖으며 눈물을 토해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연출이 필요 없는 다큐멘터리였다.
전국의 KBS 앞은 이산가족 사연들을 적은 대자보 소자보들로 뒤덮였고 10초 정도 방송에 나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또 그 앞을 서성이며, 자신들의 사연을 덧붙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 가운데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TV에서 할머니 이름과 비슷한 사연을 본 것 같다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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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무슨 춘이라고 하는 거 같은데 황해도에서 함경도로 시집 간 뒤 소식이 없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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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의 함자는 장자 난자 춙자였고, 이 말이 할머니에게 전해진 순간 서울의 큰집과 부산의 우리 집에는 동시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할머니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가족들을 만날 설렘을 호소하셨고 모든 가족들이 한 번씩은 KBS 앞에 나가서 그 많은 사연들을 읽거나 밤을 새가며 방송을 봐야 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시집오신 것은 거의 1920년대의 일이니 전쟁 때 이산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할머니가 친정 쪽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한 적도 없으셨기에 그 집념(?)은 다소 놀라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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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내용을 뒤지다가 가장 근접한 사연이 강단준이라는 할머니가 황해도에서 함경남도 함흥으로 시집갔다는 것이었는데 지역도 나이도 모두 틀렸다. 그것을 할머니께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한동안 우울함을 떨치지 못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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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고나니까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더라. 왜 이제 이 난리를 치는가 싶기도 하고, 바로 앞동네에 내 동생이 살고 있는데 내 모르고 사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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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만 가족이 넘은 이산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나눴지만 그 기쁨에 부러운 눈길을 던지며 시간만 나면 KBS 앞의 공터에 나붙은 사연들의 파노라마를 한 장 한 장 정독하며 시간을 보내던, 끝내 머리카락 보일까 숨어버린 듯 나타나지 않은 가족들의 사연에 눈물 흘린 사람들, 진짜로 인연이 거기까지였나보다 체념해 버린 사람들의 수는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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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나마 남쪽이라는 테두리에서의 일이었을 뿐, 남과 북에 흩어진 이산가족들은 그런 범국가적인 지원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세월을 더 엮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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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KBS는 세계 언론이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에 주목한다면서 그 취재 현장을 자랑 삼아 방송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 어디에 그런 볼 거리가 있겠으며, 그런 구경꺼리를 알고도 지나칠 언론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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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스스로 숨을 쉬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부모 형제 자매를 찾는 인간적인 갈구, 그리고 그들을 엮어낸 매스미디어의 발전이 빚은 희대의 장관을 말이다. 1983년 6월 30일은 가매장됐던 전쟁의 비극이라는 시신의 팔이 나 아직 죽지 않았노라 흙 속에서 번쩍 치켜들렸던 날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이산가족 찾기 장면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그야말로 주체할 수 없을만큼 눈물이 줄줄 흘렀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면서도 소매가 적실만큼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