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5년 8월 5일 어느 세관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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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5일 저녁 여수 세관 마당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전날 세관은 밀수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배를 수색하고 선주를 연행했다. 세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은 선주의 아들들이었다. 선주의 아들들은 밀수품이 배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다 (밀수품은 후일 육지에서 발견됐다) 조사 도중 아버지가 구타당했다면서 항의했고 서른 네 살의 세관원 서정휴는 그런 적 없다고 맞서면서 한 마디를 던졌다. "나는 나라와 세관을 위해 임무를 다하고 있는 거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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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아들 중 한 명이 칼을 꺼냈다. "세관 위해 목숨 한 번 걸어 볼래?" 형제는 서정휴에게 살기등등하여 다가섰고 서정휴는 권총을 뺐다. 모두 다섯 발의 총을 쐈지만 허공을 향해 쐈을 뿐 차마 사람을 쏘지 못했던 그에게 선주의 아들 형제는 사정없이 칼을 휘두른 후 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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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휴는 억지로 일어나 병원에 가려고 세관을 나왔지만 피칠갑을 한 그를 택시들이 태워 주지 않아 속절없이 피만 흘린 끝에 뒤늦게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서울대 문리대에 합격하고도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했던, 부산 마산과 더불어 밀수 천국으로 불리던 고장에서 밀수범들과 정면으로 맞섰던 청년 공무원이 사위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그의 둘째 딸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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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남해안에서 쥐치나 기타 해조류를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던 활어선 가운데 어떤 배들은 선원들에게 월급을 거의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운항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당연하게도 그 비결은 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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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어선 어창 밑에는 물고기 대신 일본 가전제품이나 오토바이 부품들이 그득 들어있는 일이 흔했다. 활어수출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곳이 섬 많고 해안선 복잡하여 밀수항으로는 최적지라 일컬어지던 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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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가서 인물자랑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말고 여수 가서 돈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해방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즈음처럼 그 실감이 진한 적은 드물었다. 폭력 조직과 결부된 밀수 조직이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했고 인구 13만 가운데 4만 명이 밀수와 관련해서 먹고 살고 있다는 과장섞인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밀수 자체에 대한 죄의식도 엷어질 수 밖에 없었다. 여수 시민 600명이 서정휴 살해범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냈던 사실은 그 슬픈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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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박정희의 유신 정권은 서정휴 사건을 계기로 '여순 사건 이후 최대'의 공권력을 발동하고 남해안 일대에서는 밀수와의 전쟁이 펼쳐진다. 수없는 사람들이 특명감찰반 수사본부에 끌려와서 시멘트 바닥에 하루 종일 꿇어앉았다가 수사관의 발길질에 채이고 뺨을 맞았다. 이후 계속된 수사 속에 부산의 밀수왕 허봉용도 체포되고 전직 경찰이 포함된 밀수 조직의 두목들과 현직 경찰서장 이하 밀수꾼들을 비호하던 공무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남해안 일대를 뒤덮던 밀수의 그림자는 이후 그 어둠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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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근절에 헌신적이었던 한 공무원의 죽음이 일으킨 바람은 태풍이 되어 남해안을 강타했다. 지금은 그렇게 가깝게 들리지 않지만 한때 밀수는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었던 일상이었다. IMF 때 벌어진 금모으기 운동을 기억해 보자. 그때 전국에서 국민들이 내놓은 금의 총량은 227톤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금 산출량은 1.5톤을 넘을까 말까이고 200톤을 수입한 적도 없다. 태반이 밀수품이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아이의 돌반지, 물려받은 금가락지가 어느 밀수꾼이 항문 속 에 숨겨 들여왔던 금괴의 잔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남대문 시장 도깨비 시장을 메웠던 번쩍이는 일제 물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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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밀수는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지만 가려진 역사의 한페이지였다.천하의 삼성도 사카린 밀수범이었고, 박정희 역시 장준하로부터 "밀수 왕초"라는 말을 듣고 펄펄 뛰지 않았던가 . 1975년 오늘 한 세관원은 그 어둠의 꼬리와 싸우다가 관청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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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고인이 뛰어든 밀수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