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 맛먼저 보시면 아무래도 도움이...
화엄사를 지나친 건 실수였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린 후 곧장 노고단으로 향하는 등산로에 들어섰다. 어디를 가도 비슷한 절간, 들여다봐야 그저 그런 석탑과 부처님밖에 더 있으랴. 아침나절에 인파도 많아서 발길에 치이며 절 구경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2박 3일 일정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제때 하산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후 지금까지 화엄사에 가본 적 없으니, 잠시 머무르기라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은 등반 중 최고의 난코스였다. 계곡 밑에서 정상까지 일직선으로 오르는 길이니 어련하겠냐만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길은 내 숨도 가파르게 만들었다. 오기가 생기게끔 디자인된 길이다.
한동안은 나무에 가려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어오르다 보니 한 두 번 씩 수다스러운 산 밑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노고단에 가까워지자 이제 정 뗄 때가 되었다는 듯 마을의 조감도를 실컷 보여주었다. 하늘에 가까이 가는 것을 체감할 정도로 우리는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산의 끝자락은 볼 때마다 뒤로 물러나 있었다.
계곡의 물소리가 어느 바위 밑으로 숨어들어서 나뭇잎 부비는 바람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남았을 때 정상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그즈음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쭈쭈바와 차가운 물을 파는 아저씨 옆을 지나쳤다.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고 좁은 등산로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피해가야 했다. 매우 가파른 길을 오른 직후였다.
의문 1.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곳에서 팔아야 잘 팔릴 텐데 왜 여기 선 채로 장사를 하는 걸까. 저것을 사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보면 관성에 젖은 발걸음은 이미 한참을 지나 있을 텐데 말이다.
의문 2. 저 무거운 것을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왔을까. 언뜻 보니 얼음까지 채워져 있는 것 같은데.
의문 3. 설마 이 길을 매일 오르는 걸까.
의문의 이 사나이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였다.
당시 '내일은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젊은이들 사이에 무척 유행했다. 그중에 등산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몇 시간을 올라가 정상에 섰지만, 자동차가 휙 지나가는 장면이 연기자들의 표정과 어우러져 허무한 웃음을 선사한 내용이다.
우리가 그랬다. 노고단을 차로 오를 수 있다는 얘기는 어렴풋하게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면전에 대고 지나갈지는 몰랐다. 아스팔트가 가파른 등산로를 갑자기 끊었다. 굴 밖으로 나오는 두더지처럼 고개를 빼꼼히 내밀면 눈높이에서 자동차 바퀴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내일은 사랑의 한 장면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그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혼성그룹이고 우리는 팀웍 좋은 단일팀이라는 것.
쭈쭈바와 물을 팔던 아저씨는 분명 여기부터 내려갔을 것이다. 아주 가파른 경사를 아이스박스를 들고 올라갔다는 주장보다는 내려가지 않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그리고 도로부터 그곳까지의 거리는 올라오는 거리보다 훨씬 짧았다.
우리는, 다시 온다면 반드시 노고단까지는 차를 타고 오르리라 다짐했고 이듬해 다시 왔다. 그래서 두 번째 종주는 약간 여유 있는 2박 3일 일정이었다. 1차와 2차 멤버가 바뀌긴 했어도 송어 은어를 함께 먹은 나와 두 선배는 붙박이였다.
지리산 여행을 포스팅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한참 동안 기억을 정리해 보니 난감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첫째는 1차와 2차 종주의 기억이 뒤죽박죽이라는 것.
둘째는 몇 가지 잔상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 양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
그래서 할 수 없었다. 막 섞어서 쓰고 한 번의 여행인 척하는 수 밖에. 꼭 필요해서 확연하게 구분이 가능한 경우만 1차와 2차를 나누기로 했다. 또 한가지, 터무니없이 적은 양은 상상력을 조금 동원하기로 했다. 같은 사실이라면 그때의 나, 지금의 나, 그다지 다른 느낌은 아니리라. 사실적인 부분은 그대로 사실을 적시하고 그 느낌과 감상은 조금 덧붙일 수도 있다.
이제 노고단까지 남은 길은 산책로와 다름없었다. 포장길 따라가는 것이라 오히려 지루했다.
노고단 정상에서 반야봉과 천왕봉 쪽을 보았다. 내 작은 한 걸음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저기 도착할 수 있을까. 까마득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이제는 능선일 뿐이다. 계곡 밑에서부터 올라와야 하는 수고는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착각이었지만.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로 발을 옮겨 우리는 고즈넉한 오솔길에 들어섰다. 오솔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갔다. 바위를 넘어가거나 푹 패인 골짝을 지나갈 때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정도가 아니면 산길이 아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이 안녕하세요 하며 지나갔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인사가 처음에는 얼떨떨했어도 산 사람들의 친근함이려니 생각했다. 이내 우리도 먼저 인사를 건네며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그랬다면 곱지 않은 시선에 꽤 시달렸을 것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 중 가장 편한 코스를 걸으며 우리는 지리산을 얕잡아 보기 시작했다. 능선이라고 해서 평탄한 길이 아니고 수많은 봉우리를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 봉우리들이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반대쪽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 평온할 수 없었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