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평소처럼 이불속에서 스팀잇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문득 침대 밑에 뭔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이 설마, 무시하려 해도 이상하게 자꾸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찝찝하다. 당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 밑을 확인한다. 그런데 앗, 정말로 있었다! 당신은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비명을 지르기 전에 생각해보자. 그것은 사람일까, 귀신일까? 침대 밑에 누가 있는 쪽이 더 무서울까? 사람? 아니면 귀신?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글을 각색해서 써보았다. 그 글에 달린 댓글 대부분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했다. 나도 사람이 더 무섭다.
귀신은 당장 날 어찌 해꼬지 못할 것 같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원한에 찬 얼굴로 노려보긴 하겠지만,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것 같진 않다. 내가 놀라서 기절해버린 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사라져있지 않을까?
무서운 이야기, 괴담은 흔히 그런 식으로 마무리된다. 실제로 귀신을 본 적이 없으니 확신할 순 없지만, 한국 귀신들은 겁만 주고 가버릴 것 같다. 한이 너무 깊은 귀신이라면 매일 찾아와서 괴롭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쨌든.
그러나 사람은 당장 날 어떻게 할 수 있다. 내가 놀라서 기절해버리면 그 사람 입장에선 땡큐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콩팥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이게 그나마 나은 결말이다. 어쩌면 영영 눈을 뜨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 사람의 정체가 동생이 나를 놀래켜주려고 몰래 숨어있던 거면 기가 막히고 웃길 것이다. 하지만 가족도 친구도 아닌 낯선 사람이라면 웃음은커녕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버릴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 혼자 살고 있으며 지독한 겁쟁이다. 침대 밑에 낯선 사람이 숨어있는 상상을 하기만 해도 무섭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 비할 공포는 아니지만, 살아오면서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던 적이 몇 번 있다. 오늘은 그런 경험담 중 하나를 써보려 한다. 실화라서 결말이 흐지부지하고 읽는 사람에 따라 하나도 무섭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몇 년 전 일이다. 그때 나는 방 두개짜리 작은 월세 아파트에서 친구와 살고 있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친구가 다니던 회사의 회식날이기도 했다. 친구는 회식에서 빠지고 싶어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직장인이 타당한 이유없이 회식을 뺄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조건 참석해야 했다.
나는 거실에서 TV를 보며 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9시쯤 올 것 같다고 한 친구가 10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았다. 슬슬 불안해졌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마음을 졸였다. 친구는 158cm에 42kg의 몸집이 작고 가냘픈 여자였고,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택시가 들어오길 꺼리는 외진 동네에 있었으며, 요 며칠 흉흉한 뉴스를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젊은 여성 실종, 납치, 의문의 변사체 등등...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똑똑 울렸다. 나는 후다닥 일어나서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었더니 친구가 취해서 눈이 풀린 상태로 어두운 복도에 우뚝 서 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화도 좀 났다.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뭐라했더니 친구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좀비처럼 스르륵 집으로 들어왔다. 술이 너무 취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친구는 현관 바로 옆에 붙은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 현관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문을 못 닫게 잡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문 뒤에서 슬그머니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 점퍼를 입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자기가 택시기사라고 했다. 친구가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기에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까지 업고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아직 택시비를 못 받았다고, 만원을 달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남자는 숨을 거칠게 헐떡거렸다. 마치 백미터 달리기라도 하고 온 것처럼.
나는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하고 몸을 돌려 방에 누워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택시비 내게 만원을 달라고 했는데 친구는 이미 잠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가난했기에 지갑에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없었다.
남자는 계속 문을 잡고 복도에 서 있었다. 나는 정말 죄송한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친구의 방으로 들어갔다. 코트도 안 벗고 누운 친구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찾아서 방을 나오다 흠칫 놀랐다. 남자가 어느새 현관에 들어와 있었다. 현관문이 닫히지 않게 한쪽 발을 뒤로 빼서 문틈에 끼운 상태로.
순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기분을 애써 무시하면서 남자에게 다시 물었다. 택시비가 얼마냐고.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택시비가 이만 원이라고 말을 바꿨다. 할증이 붙어서 돈이 더 나왔다는 것이다.
아직 11시가 안 됐는데 이 시간에 할증이 붙나? 그것도 그렇게 많이? 친구의 회사 근처에서 여기까지 차가 아무리 밀려도 만원이면 올 텐데?
남자의 말엔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또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번에는 그 기분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갑을 든 채로 머뭇거렸다. 그랬더니 남자가 이만원만 주면 된다고, 자기도 바쁜 사람이라고, 이만원이면 되는데 왜 그걸 못 주냐고 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당장이라도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올 태세였다. 그때였다.
"왜? 뭐 시켰어?"
안방에서 남자친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남자친구는 주말을 나와 보내려고 집에 놀러와 있었는데, TV는 재미없다고 컴퓨터로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현관에서 큰소리가 난 걸 듣고 거실로 나온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남자친구는 181cm에 몸무게가 90kg을 넘어가서 몸집이 꽤 큰 편이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아니라고 대꾸하고 현관을 봤다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남자가 현관에서 사라졌다. 묵직한 현관문이 저절로 서서히 닫혔다.
나는 자동잠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서 있었다가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봤다. 복도에도 아무도 없었다. 대신 계단을 급하게 뛰어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한 번에 몇 개씩 뛰어내려가는지 소리가 금세 멀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혼란스러웠다. 남자가 어째서 택시비를 받지 않고 그냥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오전, 느지막히 일어난 친구에게 말했다. 너 어제 택시에서 자는 바람에 택시비도 안 내고 택시기사에게 업혀왔다고, 앞으로 술은 조심해서 마시라고.
친구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자긴 택시비도 냈고 아파트까지 제발로 걸어와 엘리베이터에 탔다는 거다. 너무 졸려서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들긴 했지만 다 기억난다고 했다.
내가 그 말을 안 믿자 친구는 억울해하더니 방으로 들어가서 코트를 들고 나왔다. 내가 뒤지지 않은 쪽의 주머니를 뒤져서는 영수증을 꺼내서 보여줬다. 택시비를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이었는데, 날짜와 시간대가 어젯밤이 맞았다. 금액은 만원이 조금 넘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친구에게 어젯밤 일을 이야기해준 뒤에 물었다. 택시기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나냐고. 친구는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야구 모자를 쓰진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남자를 보면서 느낀 위화감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껏 택시를 타면서 야구 모자를 쓴 택시기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젊은 기사도 못 봤다.
친구는 택시 회사에 전화해서 따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그 남자는 우리 집을 알고 있다. 괜히 말했다가 감정이 상해서 혹시나 해꼬지하려고 찾아오면 어쩌냐고, 어쨌든 어제 이만원을 안 줬으니 그걸로 됐다고.
사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남자가 택시 기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였다.
늦은 밤, 아파트 단지 근처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남자는 막 아파트 앞에 선 택시를 목격한다. 택시에서 조그만 몸집의 여자가 내린다. 여자는 많이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아파트로 들어간다. 남자는 택시가 떠난 것을 확인한 뒤 여자를 따라간다. 왜? 택시기사인 척하고 돈을 받기 위해서? 단지 그 이유 하나뿐이었을까? 그럼 왜 돈을 받지 않고 도망쳤을까?
내가 지나친 상상을 하는 걸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심하게 부정적이다. 늘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다. 그래서 친구에게 내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만약 어젯밤, 마침 남자친구가 집에 놀러와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뉴스에서나 보던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친구는 영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내 말대로 택시회사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때 그 남자가 누구였는지, 정말로 택시 기사가 맞았는지 아닌지를 모른다.
긴 이야기의 결말이 이런 식으로 찝찝하게 끝나서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소설이었다면 그럴싸한 반전을 넣었겠지만 실화니까 그냥 마무리가 덜 된 상태로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