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를 들어가며]는 뉴욕의 투자은행에 취직하기까지의 제 이야기를 각색한 연재 수필입니다. 지난 편은 본문 밑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경영대에서 가장 어려웠던 수업은 회계 원리도 재무론도 아닌 바로 커뮤니케이션 수업이었다. 매주마다 주제를 하나씩 정해서 30명의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는 수업이었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다 온 분이었다. 뿔테 안경과 백발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을 연상시켰는데 매 수업마다 엄청난 카리스마로 우리를 압도하곤 했다.
외국인이라는 '장애'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고자 첫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을 찾아가 내가 한국에서 유학을 왔다고 인사를 드렸다. 하지만 베테랑답게 내 의도를 단숨에 간파한 교수님은 "만나서 반가워요. 하지만 내 수업에서는 외국인이라고 특혜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라고 웃으며 답변을 해줬다.
첫 만남은 그렇게 멋쩍게 끝났지만 나는 미국 애들에게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으려 집에서 혼자 대사도 외우고 거울을 보며 콩트도 연습하는 등 발버둥을 치며 그 학기를 보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가을학기가 진행되는 동안 교수님과도 조금씩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투자은행 인턴십에 지원할 때 필요한 이력서와 커버레터(왜 회사에 지원하는지를 설명하는 1장짜리 자기소개서)는 11월이 되자 어느 정도 완료가 되었고, 이제 '엘리베이터 피치'를 준비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 피치'란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관심 있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소개하고 왜 이 회사에서 지원하고 싶은지를 설명하는 스킬이다. 물론 실제 네트워킹이나 인터뷰에서는 이것보다 조금 더 긴 3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왜?(why?)'를 설명해야 하는 기본 개념은 비슷하다.
이력서나 커버레터와 달리 이 짧은 자기소개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고민 끝에 소통의 달인인 커뮤니케이션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오피스를 찾아갔다.
"3분 줄 테니 본인 이야기를 좀 해볼래요?"
내 상황을 설명할 틈도 없이 교수님은 무작정 이력서를 달라고 하더니 곧바로 실전모드로 돌입했다. 전혀 사전 준비가 없었기에 당황했지만 '내 이야기를 3분 동안 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어?'라는 심정으로 이력서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읊조렸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을 왔고..."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니 3분이라는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졌고 어느 부분을 강조하고 줄여야 할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와중 아무 표정 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 교수님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졌고 결국 이력서에 적힌 내용들을 횡설수설하다 보니 5분이 훨씬 지나있었다. 교수님은 잠시의 침묵 후에 안경을 벗으며 나에게 질문을 했다.
"왜 투자은행에 가고 싶다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경영과 금융에 관심이 있고 또 엑셀로 작업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약 당신이었다면 면접관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아요"
교수님은 이력서를 다시 한번 쓱 보더니 나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더 큰 세상을 보고 도전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유학 후에는 진로에 대한 여러 고민이 많았는데 중간에 군 복무를 하며 2년간 쉬는 동안 제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책을 읽으며 금융권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고, 현재 업에 계신 다양한 분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투자은행이 졸업 후 제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라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업들이 중요한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직접 보며 배우고 싶고, 또 제 동아리 활동 내역을 통해서 보실 수 있듯 엑셀을 활용해 여러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이런 관심사와 경험을 살려 여름에 투자은행에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귀사에 지원을 했습니다. 제 인생의 두 번째 도전이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성공적이길 희망합니다."
분명히 내 이야기였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내용은 내가 말했던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이야기에 힘이 실려있었고, 결정적으로 듣는 입장에서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처음 보는 이력서를 갖고 본인의 얘기인 마냥 단숨에 능숙히 소화하는 교수님을 보며 역시 프로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이야기를 이력서에 있는 그대로 얘기한 건데 느낌이 많이 다르죠?
사실 엘리베이터 피치는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전달력이에요. 나는 자기소개가 요리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재료가 있어야 하지만 결국 레시피는 그 재료들을 어떻게 조합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지가 중요한 거죠.
당신의 이력서를 보면 좋은 재료들이 많이 있어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새로운 모험을 하기 위해 미국까지 유학을 왔고 또 군대에서의 2년이란 시간 동안 인생에 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잖아요. 이미 이 두 가지만으로도 투자은행에 도전하는 90%의 다른 지원자들과 차별이 되는 거예요.
전달력은 내용이 아닌 다른 사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얼굴과 표정, 바디 랭귀지, 목소리 톤의 높낮이와 엑센트, 말을 하는 속도, 그리고 열정과 자신감까지 다 영향을 끼치죠.
인터뷰는 당신의 관심을 가장 믿을만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과정이에요 (interview is all about expressing your enthusiasm in a believable way).
그리고 그 관심을 보여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열정입니다. 당신은 투자은행에 대해 생각도 많이 해봤고 열정도 있는 것 같아요. 이제 그 열정을 잘 포장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교수님은 그 후에도 거의 30분가량 인터뷰에 관한 좋은 조언을 해주셨다.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인터뷰는 첫 5분 안에 판가름이 난다고 한다. 그리고 첫 5분은 보통 지원자가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피치가 인터뷰의 당락을 사실상 결정짓는 셈이었다.
사실 투자은행의 여름 인턴십에 지원하는 대학교 3학년 학생들의 이야기는 일부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다 비슷하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왔고, 어떤 특별한 계기를 통해 금융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다른 인턴십 경험이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투자은행에서의 업무를 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 자체로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지원자는 정말 드물다고 보면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원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보여주는 침착함, 처음 소개를 시작할 때의 목소리 톤과 얼굴 표정, 그리고 얘기하는 속도와 바디랭귀지를 통해서 보이는 자신감과 열정이다.
"사실 면접관들은 지원자의 이력서를 사전에 읽지 않았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지원자가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이력서의 다른 내용들을 훑으며 이다음에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죠."
교수님은 본인이 빅토리아 시크릿에 있을 때 인터뷰를 진행했던 경험을 내게 이야기해줬다.
"이럴 경우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의 자기소개는 뒤에서 들리는 배경음악과 비슷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고개를 끄덕이며 '이 친구 괜찮은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만약 중간에 당황하거나 버벅거리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내용을 아예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 왜 특정 업계나 회사에 지원하고자 하는지 면접관이 명확히 납득할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어야 한다. 단지 그 동기 자체가 좋은 인터뷰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버하지 않고, 또 너무 밋밋하지도 않게 본인의 열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실전 연습을 최대한 많이 해보는 게 중요하죠. 그게 혼자가 되었든, 친구와 함께라든, 모의 인터뷰를 통해서든 아니면 실제 업계에 계신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든 말이에요."
수긍이 갔다. 백지상태에서 누군가와의 관계를 새로 만들어 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첫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첫인상을 만들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피치를 정말 열심히 연습해야 됩니다. 3분은 내 인생을 정리하기에는 굉장히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상대방을 설득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죠.
당신만의 3분짜리 이야기를 준비해 보세요."
교수님과의 30분은 짧았지만 내 인생을 바꿀 만큼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 후 나는 매일 내 이야기를 3분으로 압축해서 정리하는 것을 연습했고, 수정을 한 다음 또다시 연습을 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이야기를 외우는 대신 큰 흐름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외운 이야기에서는 절대로 감정의 생생함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 다음에는 친구들과 모여 서로 연습을 했다. 내 이야기를 하며 친구들에게 많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또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덧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12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전에 가장 중요한 절차가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얼마 전 기업설명회를 통해 만났던 선배들에게 '네트워킹 전화'를 요청하는 일이었다.
한 달간 모아 온 명함들을 책상 위에 모두 펼쳐 은행별로 정리를 했다. 그리고 전화할 시간을 잡기 위해 각 선배들에게 보낼 이메일을 하나씩 작성하기 시작했다.
준비기간은 끝났다. 이제는 실전이었다.
월가를 들어가며:
프롤로그 (01) / 3학년 가을학기 (02) / 위험한 구애활동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