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월가를 들어가며: 첫 최종면접 (10)

menerva(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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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를 들어가며]는 뉴욕의 투자은행에 취직하기까지의 제 이야기를 각색한 연재 수필입니다. 지난 편은 본문 밑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제 이름은 Paul입니다. 현재 은행에서 Power & Utility 팀을 담당하고 있죠. 학부와 MBA는 텍사스에서 나왔고 월가의 여러 투자은행들을 거쳐 A 은행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백발의 신사는 명함을 내 자리로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명함에는 'Managing Director'라고 적혀있었다. 전력회사와 에너지회사들을 담당하는 Power & Utility 팀의 대표 같았다. 높은 사람과 면접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책상 밑의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더 큰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학부에서는 현재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2학년 때 여러 진로를 놓고 고민을 하던 중 투자은행에서 오래 근무를 한 뒤 사모펀드를 운용하고 계신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금융업계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자 제 인생 멘토를 자처하신 뒤 업계에 계신 많은 분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금융업계에도 다양한 직업이 있었지만 제가 가장 관심이 있는 곳은 투자은행이었습니다. 직접 체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2학년을 마친 후 인턴 자리를 알아봤고, 운이 좋게도 한국에 소재한 투자은행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업무 강도도 높고 심지어 밤을 새기도 했지만 여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인턴십이 끝날 무렵에는 학부를 졸업 후 투자은행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도 좋았지만 미국에서 더 큰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 A 은행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면접을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컨디션도 좋지 않은 데다 최종면접이라 이야기를 하는 도중 정신이 약간 혼미해졌다. 하지만 수십 번도 넘게 연습을 한만큼 몸이 기억하는 대로 자기소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Paul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미소도 짓지 않은 채 계속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내 얘기를 들었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있는 사자처럼 파란 눈으로 날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한국에서 좋은 경험을 한 것 같은데 굳이 뉴욕에 지원을 한 이유는 뭐죠?"

"아까 말씀드린 대로 더 큰 도전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더 큰 시장을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시아 M&A 시장이 많이 성장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북미 M&A 시장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더 큰 시장의 최전선에서 일을 하며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여러 책을 읽으며 뉴욕에 대한 동경이 늘 있었습니다. 수많은 영웅들이 월스트리틑 거쳐갔듯 저 또한 뉴욕을 직접 경험하고 싶습니다. 뉴욕에서 일을 하면 나중에 한국으로 가는 것이 더 수월할 것 같기도 하고요."

"한국이요? 나중에 한국을 갈 계획이 있나요?"

 
정신줄을 놓았는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고 당분간은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고 둘러댔지만 Paul은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았다고 했다. 왠지 인터뷰의 첫 스텝부터 꼬인 느낌이었다.

"많은 은행에 지원을 했을 텐데 굳이 우리 은행에 오고 싶은 이유는 뭡니까?"

 
역시 꼼꼼하게 준비를 한 부분이었기에 정확히 답을 할 수 있었다. A 은행이 글로벌 투자은행인 만큼 세계 곳곳에 네트워크가 있는 것을 좋게 본다고 얘기했다. 또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공격적으로 사업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공격적으로 사업을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만큼 파이를 키우고 싶다는 뜻이고 그건 결국 저같이 은행에 새로 입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뜻이니까요."

 
A 은행에 대한 최근 뉴스를 언급하며 회사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사실 기교적인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답변이었다. 그래서인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는 면접관에게 내 진심이 잘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간단한 호구조사가 끝나자 Paul은 이력서에 적힌 다른 내용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름 인턴을 하면서 뭘 했는지, 뭘 느꼈는지, 학업 외에 학교에서 어떤 동아리 활동들을 하는지 등 나의 지난 3년을 여러 각도로 파헤쳤다.

나는 그때마다 이력서에 적은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느끼고 배운 점들을 나열했다. 대답에 막힘은 없었지만 뭔가 2% 부족한 것만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흠? 군에서 2년간 복무를 했네요?"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Paul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뉴욕까지 와서 군대에 대한 썰을 풀게 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2년 동안 왜 군대를 갔다 왔는지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저도 사실 대학 때 ROTC였기에 군 복무를 잠깐 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죠."

 
Paul이 장교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의 근엄한 표정이나 절도 있는 행동들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처음으로 단순한 대화가 아닌 면접관과 마음이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드디어 연결고리를 찾았다는 기쁨에 군대에서 있었던 여러 일화들을 신나게 이야기해버렸다.




그 후 형식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30분이 마감되며 인터뷰가 끝났다. Paul에게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고 악수를 한 뒤 방을 나왔다. 그리고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친구에게 행운을 빈다고 얘기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첫 인터뷰가 끝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자리에 앉아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저 방에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다 온 거지...'

 
나를 뽑아달라고 어필을 해야 할 면접에서 혼자 신이나 전혀 관련 없는 군 복무 이야기로 10분도 넘는 시간을 허비했다. 얘기를 할 때는 정신이 없었지만 인터뷰 장면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처음에는 살짝 미소를 짓던 Paul의 얼굴도 거듭되는 군대 얘기에 조금은 식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연결고리를 찾았다는 기쁨에 취해 면접임을 망각하고 내가 할 말만 실컷 해버린 것이었다.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남은 2개의 인터뷰를 잘 보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기시간 30분이 끝나자 내 이름이 다시 호명됐고, 나는 인사과 담당자의 지시에 따라 이번에는 회의실을 나가 가운데 방으로 향했다.


"어서 와! 자리에 앉아."

 
가운데 방에는 젊은 뱅커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영화 [월스트리트]에 나오는 마이클 더글라스처럼 긴 머리는 포마드로 넘겨져 있었고 며칠 면도를 하지 않은 듯 턱수염이 가득했다.

"내 이름은 Lee야. 3년 차 애널리스트고 너의 학교 선배이기도 하지. A 은행에서 사모펀드 클라이언트들을 담당하는 Leveraged Finance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어. 만나서 반갑다. 너 자기소개도 좀 해줄래?"

애널리스트여서 그런지 방금 전 MD와 진행했던 인터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Lee는 내가 얘기를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고 손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리액션도 잘 해줬다. 나와 1차 면접을 했던 Tiffany와 같은 팀에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1차 때 Tiffany랑 면접을 했다고? 걔가 띨띨해 보여도 사실 엄청 똑똑한 애야. 너 이력서를 보니 투자은행에서 벌써 인턴을 한 경험도 있고 학교에서 투자 동아리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 완전 하드코어 월가 워너비네!

사실 인성면접은 MD 두 분이서 진행하실 예정이라 나는 회계랑 기업금융에 관련된 테크니컬 한 부분에만 집중을 할 거야. 내 면접만 통과하면 지긋지긋한 수학 공식들을 다시는 얘기하지 않아도 될 테니 조금만 버티자고. 오케이?

첫 번째 질문은 회계 질문이야. 한 기업이 있는데 작년보다 올해 감가상각 (Depreciation) 비용이 $10 증가했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3가지 재무제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해줄래?"

 
1차 면접 때 Eric과 Tiffany가 물어봤던 것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회계 문제였다. 나는 갖고 온 노트에 숫자를 적어가며 Lee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손익계산서(Income Statement)를 살펴보겠습니다. Depreciation이 증가했기에 세전이익(Pre-tax Income)은 $10 감소를 했고, 법인세를 40%로 가정을 하면 당기순이익(Net Income)은 $6 감소를 한 셈입니다.

현금흐름표(Statement of Cash Flows)로 넘어가면, Net Income이 $6 감소를 했지만 Depreciation은 현금 비용이 아닌 회계상의 비용이므로 $10을 다시 더해줘야 합니다. 투자활동과 재무활동으로부터 발생한 현금은 변화가 없으니 해당 기간 동안 증가한 현금은 바로 $4입니다.

마지막으로 재무상태표(Balance Sheet)를 보겠습니다. 왼쪽의 자산부터 살펴보면 현금은 $4 증가했습니다. 또 Depreciation이 $10 늘어난 만큼 유형자산은 $10 감소를 합니다. 현금과 유형자산을 합치면 자산은 총 $6만큼 감소가 된 것입니다.

오른쪽의 부채와 자본을 살펴보면 부채는 변화가 없고 자본의 경우 Net Income이 $6 감소를 했기에 유보이익(Retained Earnings)이 줄어듭니다. 재무상태표의 왼쪽과 오른쪽 모두 $6씩 감소를 했기 때문에 문제없이 발란스를 유지하게 됩니다."

"오케이! 아주 좋아.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맞췄군. 역시 우리 학교 후배들이 회계 문제는 잘 맞힌다니깐."

 
Lee는 유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다음 문제는 1차 면접 때도 등장했던 DCF 밸류에이션 기법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1차 면접 때는 공식과 기본 개념만 물어봤다면 이번에는 회계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러 숫자를 주며 직접 계산을 시켰다.

Eric과 Tiffany에게 설명을 했던 것처럼 분자에 들어가는 Free Cash Flow와 분모에 들어가는 할인율(Discount Rate)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계산해 나갔다.

할인율을 계산할 때 사용되는 여러 공식들을 언급하자 Lee는 나를 멈춰가며 왜 공식에 부채 비율과 자본 비율이 들어가는지, 그리고 베타계수가 정확히 뭘 나타내는지를 물어봤다. 1차 인터뷰 이후 추가적으로 공부를 하며 부족한 내용들을 익혀놨기에 대답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첫 번째 인터뷰와는 달리 Lee가 반응을 잘 해줘서 그런지 조금 더 밝은 마음으로 인터뷰에 임할 수 있었고, 마음이 편해지자 인터뷰도 더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좋아! 아주 잘하고 있어. 어디 보자... 투자 동아리에서 밸류에이션 기법 중 Sum-of-the-Parts(SOTP)를 해봤다고 이력서에 적어놨네. 이거 어떻게 하는 건지 설명 좀 해줄래?"

 
SOTP란 사업부가 여러개인 회사의 가치를 계산할 때 쓰이는 밸류에이션 기법이었다. 예를 들어 LG생활건강과 같이 여러 사업부가 있는 회사는 비슷한 회사가 잘 없기에 유사기업 분석법을 사용해서 가치 측정을 하는 것이 어렵다.

이럴 경우 사업부문을 쪼갠다음 각각의 사업부와 비슷한 기업들을 찾아 유사기업 분석법으로 가치를 측정한 후 하나씩 더하는 방법으로 전체 회사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계산할 수가 있다. 그래서 '부분의 합'이란 뜻을 가진 Sum-of-the-Parts 기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실 동아리에서 한번밖에 해보지 않았고 또 계산을 해본지도 몇 개월이 지났었기에 Lee가 물어봤을 때 조금 당황을 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가며 천천히 대답을 할 수 있었고 Lee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서류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 이력서에 거짓된 내용을 적었다면 틀림없이 들통났을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이력서에 적힌 내용들을 꼼꼼히 훑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30분이 채워질 때까지 기업금융과 관련된 간단한 문제를 몇 개 더 풀었고 Lee와의 면접은 큰 탈 없이 잘 끝났다.

면접을 볼 때는 잘 몰랐는데 긴장이 살짝 풀렸는지 대기실에 돌아와 자리에 앉자 피곤이 몰려왔다. 어제 날밤을 샌 것이 갑자기 기억났다. 다음 면접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기에 마음 같아서는 눈을 살짝 붙이고 싶었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보니 면접이 잘 풀리고 있는지 다들 표정이 밝아 보였다. 하긴, Lee와의 인터뷰 난이도가 1차 면접보다는 높았지만 우려했던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인터뷰 가이드에 나오는 초-중급 정도의 난이도와 비슷했던 것 같다. 사실 중급 이상 되는 내용들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어보면 어쩌나 걱정이 됐었는데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Paul과 했던 첫 번째 인터뷰가 마음에 걸렸다. 실패한 인터뷰까지는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 같았다. 대기실에 있는 면접자들 중 유색인종 남자는 나 하나였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도 나 하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나 내가 불리한 위치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역전극을 펼칠 수 있는 큰 한방이 필요했지만 그게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미네르바 씨 마지막 인터뷰입니다. 이번에는 왼쪽 방으로 가주세요."

 
왼쪽 방은 다른 방들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복도의 끝에 위치한 방 앞에 제 3 면접장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있었다. 호흡을 크게 들이켠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백인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Jeff입니다."

 
자리에 앉자 남자가 명함을 건네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A 은행 Leveraged Finance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Industrials (기계 / 공업 / 인프라 회사들) 클라이언트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를 좀 부탁할게요."

 
이전 두 면접관들과 달리 Jeff는 목소리도 작고 MD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내가 마지막 면접이어서 지쳐 보였다. 나도 낮에 마셨던 커피 기운이 떨어져 몽롱한 상태였기에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최종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국에서 왔군요. 다른 지원자들이랑 배경이 좀 다르네요."

 
Jeff가 내 이력서를 훑으며 던진 말이 갑자기 귀에 꽂혔다.

그가 맞았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봤자 오늘 온 6명의 다른 친구들보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양복을 입고 미국인 구색을 갖춰봤자 그들보다 더 미국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순간 작년 가을에 커뮤니케이션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당신의 이력서를 보면 좋은 재료들이 많이 있어요... 투자은행에 도전하는 90%의 다른 지원자들과 차별이 되는 거예요."

지금껏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감추고 싶었지만 사실 그건 나만의 차별점이었다. 진검승부를 하려면 상대방의 규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나만의 특별한 점을 내세워 변칙 플레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우리 은행에 들어오게 된다면 앞으로 5-6년 뒤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

 
Paul과 인터뷰를 할 때는 나 자신을 지운 채 '옳은' 정답을 말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Jeff의 질문에는 정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의' 답을 말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사실 저는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갑자기 되돌아온 뜬금없는 대답에 Jeff는 약간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마음속 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며 내 퇴로를 차단했다.

"남한과 북한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어렸을 때 이산가족 상봉을 TV로 보며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왜 같은 민족인데 서로를 볼 수가 없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DMZ 건너편의 북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사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탈북자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여름 캠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가기 전날까지도 조금 두려웠지만 3박 4일간 그들과 함께 지내며 탈북자들도 나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나처럼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 어린 청소년일 뿐이었죠. 그때부터 남한과 북한이 언젠가는 통일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우리의 이상과 염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문제가 해결되려면 외교적 그리고 경제적 해결책이 동반되야하는 것이죠. 저는 그중에서 경제적 해결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통일이 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할 것이고, 통일 후에도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졸업 후 월스트리트의 최전선인 투자은행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최고의 인재들과 겨루며 최신 금융기법들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으로 돌아가 제가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조국을 통일시키는 일에 제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것이 5년 뒤가 될지 아니면 20년 뒤가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걸음씩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보이리라 생각됩니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마지막 일격을 노린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잃을 것이 없었기에 더 대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리 담대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했는지 모르겠다. Jeff와의 인터뷰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 미래 계획과 북한에 관한 질의응답을 더 하다 면접을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대기실로 돌아와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짐을 챙겨 빌딩을 빠져나왔다. 금요일 퇴근시간과 겹쳤기 때문에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빨리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야 했다. 인사과 직원은 다음 주까지 전화로 면접 결과를 알려준다고 했다.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다 너무 배가 고파 햄버거를 하나 사 먹었다. 탑승 후에는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몰려와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고, 착륙할 때까지 깨지 않았다. 공항에서 기숙사까지는 택시를 탔다. 방문을 열어 짐을 간단하게 정리한 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가 시작된 지 정확히 12시간 만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미래에 대한 걱정도, 다음 주에 예정된 다른 인터뷰들도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편한 마음으로 깊이 잘 수 있었다.

내 첫 월스트리트 최종면접은 그렇게 끝났다.



월가를 들어가며:

프롤로그 (01) / 3학년 가을학기 (02) / 위험한 구애활동 (03) / 3분짜리 이야기 (04) / 선배와의 통화 (05) / 두 가지 선택 (06) / 첫 인터뷰 (07) / 레디 인터뷰어 원 (08) / 불길한 시작 (09)


[연재] 월가를 들어가며: 첫 최종면접 (10)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