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 사진은 그것이 나중에 나비로 변신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버크민스터 풀러
현재는 과거다
차가 시애틀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졌다. 우비와 장화를 챙겨와서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나중에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진창에 빠져 흙탕물 범벅이 될 줄 미리 알았다면 아마 훈련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행 중 대만 여자분과 캐나다 남자분이 있었는데 그들의 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나중에 그들에게 들은 바로는, 우리를 옘까지 태워다 준 미국할머니는 사람의 에너지장-오라장이라고도 한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유체이탈을 밥 먹듯 하고 다른 차원을 여행하며 트럼프 카드의 뒷면만을 보면서 54개의 앞면을 다 읽어나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
한 시간 반을 달리던 차는 대형마트 앞에 섰다. 우리가 신선식품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나는 유기농 사과 한 바구니와 바나나 한 송이, 크로와상과 호밀빵을 버터와 함께 카트에 담았다. 이렇게 장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옘을 떠날 때 햇반을 너무나 신기해하는 이탈리아 할머니에게 남은 햇반을 선물로 줄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의 와인 세레모니를 위해 와인도 한 병 샀다.
이 사진은 옘을 떠날 때, 사진촬영이 허용되었던 주차장에서 찍은 컷이다. 나는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곱게 차려 입고 도착했지만 그곳을 떠날 때는 정수리에 까치집을 지은 거지꼴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몰골에 축복을 내려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훈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적어두었던 단상을 올리는 것으로 내 여행기의 끝을 마무리 하겠다.
ㅣ단상들ㅣ
매일 숲을 걸었다. 꽃들은 도착하고 구름은 비를 뿌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푸른 이끼가 벨벳처럼 깔려있는 숲에서 문장 하나만 보고 걸었다. 그 문장은 내 마음으로부터 나왔고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관찰하면 현실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현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면 다시 과거의 쳇바퀴에 갖히게 된다.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절하게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결핍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판단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시각화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시각화는 반복하면 할수록 강력해지면서 쉬워졌다.
빗속에서 안대를 하고 활을 쏘았다. 바람이 시시각각 다른 방향에서 불어왔다. 화살이 과녁에 맞는 것을 상상한 후 활시위를 당기면 과녁을 맞출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기적이라고 말하겠지만 여기에선 기적이 일상이다. 성냥개비처럼 작고 마른 할머니는 정확히 과녁 한 가운데를 맞췄다. 할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이 놀이를 하셨다고 했다.
빛 한 줌 없는 미로를 헤맸다. 안대를 하고도 청테이프로 눈주위를 단단하게 봉합한 천 명의 사람들은 여섯 시간 동안 배고픔을 참으며 void근원을 포커스했다. 비가 끊임없이 내렸고 손이 시려웠다. 오리털 점퍼 위에 우비를 입었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추위가 엄습했고 오감에 의지해 방향을 가늠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났다. 그 욕구를 따르면 '출구가 어디에 있을까', 추측을 하게 되고 거리를 계산하고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그러면 헤매게 되고 수없이 발을 밟히고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입냄새를 맡아야 했다.
"You are in the past."
"넌 과거에 있어."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void 근원에 포커스하면 된다. 오감으로 판단하면 진창에 빠졌고 포커스하면 미로의 문을 차례로 통과했다. 이 훈련을 이틀에 걸쳐 두 번 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처음 하는 말로 그 하루를 경험했다. 그곳에는 나이가 없었다.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갓 피어난 꽃처럼 사랑받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사랑 그 자체였으므로.
열흘은 훌쩍 흘렀다. 마지막 날은 나를 옘으로 불렀던 스승님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내가 쳇바퀴를 돌리거나 진창에 빠질 때마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다. "당신은 죽음을 배웠지만 삶은 잊었다." 라고. 그의 눈빛은 첫 자각몽때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존재의 눈빛과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빛을 볼 수는 있으나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은 람타이다.
여행기(2017)
1편 용기가 나를 본다
2편 스며드는 모든 것들
3편 페르시안 실링밑에서
4편 도착하는 질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