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최고의 장면을 뽑으라면 망설임 없이 엘 치보가 수염과 머리를 깎는 장면을 뽑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게 <아저씨>의 시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에서 ’당하는‘ 입장이었던 원빈과 달리 ’해하는‘ 입장인 엘 치보가 같은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두 인물의 모습에서 묘한 공통점이 느껴져 신선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큰 반전이라 생각했던 게 영화의 장르가 단편을 모아 만든 옴니버스가 아닌 스토리가 이어지는 장편이었던 것이다. 초반에 스토리마다 다른 제목이 있는 것을 보고 ‘이 영화는 각각 다른 영화를 모아놨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스토리가 모두 이어지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이어지는 스토리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교훈과 주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왔다.
등장하는 이야기 모두 현실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발레리아 이야기‘가 제일 현실적이었다. ’톱스타의 몰락‘이라는 주제는 흔히 사용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유난히 현실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발레리아가 바닥 밑으로 떨어진 개에 집착할 때에도, 발레리아의 남편과 전 아내가 서로에게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못 할 때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아의 광고 사진이 내려가고 다른 배우의 사진이 올라가는 장면에서 발레리아의 복잡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망가져가는 발레리아의 모습은 자신만만했던 초반 모습과 대비되면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전해주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이야기는 ‘옥타비오와 수잔나’ 이야기였다. 특히 머리를 깎은 옥타비오가 버스를 예약하고 수잔나를 기다리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서 수잔나를 욕할 수는 없었다. “형은 내 남편이에요”라는 대사가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형 또한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캐릭터였다. 비록 ‘은행 강도’라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만 형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투견장에 개를 보내 돈을 버는 옥타비오도 그리 도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건 아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맘 놓고 비난할 인물이 없었다. 악한 행동을 하는 인물은 많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가피한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악한 인물을 비난하고 욕하면서 얻는 카타르시스는 없었지만 이 영화는 등장인물 모두에게 공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인데도 영화를 보면서 저 상황에 처하면 나도 저렇게 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이어가며 공감까지 선사한 수준 높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