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농장> 조지 오웰, 1945
그들의 작태는 내 마음속에 분노를 일으킨다. 복서의 비참한 죽음을 은폐 조작하고 자신들의 정권을 위한 선동에 사용한 나폴레옹 일당의 이야기다. 그들의 말을 믿고 그 이상의 의혹을 밝혀낼 생각을 하지 못한 다른 동물들의 안일한 행태도 또 한 번 분노를 터트린다. 우리 또한 이런 일을 숱하게 겪어왔다. 과거 군사정권이 행한 온갖 짓거리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권력이 입맛에 맞게 조작한 것 중 우리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게 여전히 있다. 그중 대장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애국심이다.
우리는 애국심을 아무 조건 없이 갖기를 어릴 때부터 강요받는다. 애국심은 무조건이어야 하나? 왜 애국심을 가져야 하나? 이런 의문을 제기하려는 게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애국심 고취를 위해 진실을 조작하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순국선열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를 뜻한다. 이 순국선열에 해당하는 많은 참전 용사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우리는 매년 기념일에 그들을 기린다. 그리고 말한다. 그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이 나라를 소중히 지켜나가자고. 바로 여기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그들 중 원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 이도 있지 않을까? 죽음을 맞는 순간, 자신을 전쟁터로 내몬 이 나라에 분노와 원망을 갖진 않았을까? 혹자는 그런 의문 자체가 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죽음이 복서처럼 정반대로 포장된 일이 아니라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들에 대한 모독 아닐까.
어쩌면 이건, 이 날조된 애국충정은 국가가 가지는 근본적인 요소일지 모른다. 국가라는 체제를 유지하려고 모두가 암묵적으로 서로를 속이고 속아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밑에서 복서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어떠한가. 복서는 오직 농장을 위해 자신의 삶을 다 바쳤다. 그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소박한 꿈을 이루었는가?
더 작은 단위이며 우리의 노동력과 직결되는 직장으로 잠시 눈을 돌리자. 우리나라 사람의 직장에 대한 충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을 월화수목금금금으로 표현하는 건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강의 기적도 그런 근성으로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지만 오늘에 와서 '한국인은 개미처럼 일밖에 모른다’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나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는 동기는? 일하는 데에는 목적이 있다. 일에서 느끼는 성취감, 일로써 얻어지는 보상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삶은 지나치리만큼 목적만 남아있다. 그 목적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에 대한, 즉 목적의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아니,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가정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가장을 가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여유로운 삶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여유로부터 사람을 멀어지게 한다. 목적을 위해 그만큼 일터에 상주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처음의 명분과는 먼, 직장에 더 충실한 삶이 된다. 우리가 원하는 삶이 그런 것인가?
이렇게 된 원인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안다. 자신의 삶이 아닌 직장에 대한 충실이 사회에 의해 강요되었음은 명백하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시스템에 속해야만 한다. 이 시스템의 기저에는 이미 뿌리를 박아 도저히 뽑아낼 수 없는 애국심이 있다. 소속된 곳에 의문을 품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게 나라와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다. 왜 그들은 이런 걸 강요하는가? 개인의 노력이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쓰여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왜 발전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에 당분간 쉽게 답할 수 있다. "위에 빨갱이가 있으니까." 문제는 그들이 사라져도 강요는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개개인 스스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이런 신념은 전파력이 빠르며 끈질기다. 흡사 담쟁이 넝쿨 같다. 게다가 그 신념을, 신념의 배경 신화를 조작하는 나폴레옹은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그의 암묵적 협조자들도 늘 대다수를 구성한다. 개인이 그에 거스르는 건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누가 그걸 원하겠는가?
물론 이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한국이라 하지 못하고 우리나라로 불러야 한다. 한국인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으로, 한국어를 우리말이라고 해야 한다. 심지어 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전부를 '우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왜?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가? 위로 가서 이 글에 쓰인 단어들을 다시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