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소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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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thewriter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죠?”

   그녀가 빙긋 웃는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 사이에서 그보다 더 하얀 담배 한 개비가 하얀 연기를 피어올린다.

  ”확신은 없었어.”

   까만 생머리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찰랑인다. 아무것도 아닌 그 몸짓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그거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녀는 내가 두 번째로 만난 소녀다. 무슨 PC통신 내 동호회의 단체 번개에서였던 것 같다. 그녀와 나 외에도 많은 사람이 모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다른 소모임이 만들어졌는데 친목질의 끝은 분열... 이게 그녀와 나를 다시 연결해주는 끈이 되었다. 홍일점이었던 그녀가 모두의 주목과 관심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녀의 긴 생머리와 무릎 위로 오는 타이즈는 퀸에 어울리는 아우라를 만들어주었다. 모두들 그녀를 숭배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누군가는 모임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는 지레짐작만으로 빠르게 단념한 것이다.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하루에도 한두 시간씩 통화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녀는 진로 고민이나 가족 문제를 내게 상담하곤 했다. 나는 모임에서 막내인 동시에 그녀보다 한 살 어렸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일인데 그때 나는 대화방에서 곧잘 대학생, 그것도 복학생 정도로 오해 받을 정도로 말을 잘했다. 그녀와 내가 사귀는 건 시간 문제였고 시간이 다가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모임 내 유일한 공식 커플이 되었다.

  "김작아. 지금 나올래?"

   밤 11시. 삐삐를 받자 마자 전화를 하니 대뜸 나오란다.

  "빵빵오빠가 친구 알바하는 거 도와주러 가는데 같이 가재. 너도 올 수 있음 오라고. 1인당 10만 원은 가져갈 수 있대."

   학생에게 10만 원이면 큰 돈이다. 헌데 이 시간에 나가면 밤을 샐 게 뻔하다. 망설인다. 그때의 나는 '밥은 밖에서 먹어도 잠은 집에서'라는 얼빠진 신조가 있었다.

  "언제 끝내고 돌아오려고? 나는 됐어. 너도 가지 마."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빵빵오빠가 급하다고 했단 마랴. 너 안 가면 나 혼자 간다? 그래도 좋아?”
  "집에는 어떻게 들어갈 건데?"
  "몰라. 빵빵오빠가 태워주겠지, 뭐."

   막는다고 안 갈 그녀가 아니다. 내가 같이 가느냐 아니면 그녀만 가느냐 둘 중 하나. 다른 선택지는 없다. 빵빵형은 예쁜 여자친구가 있다. 내가 저 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잘 알지. 형과 나 사이에는 의리라는 게 있고. 그때의 나는 이렇듯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과는 많은 게 달랐다.

   그녀에게서 단골 카페에서 보자는 연락을 받은 건 며칠 뒤였다. 빵빵형도 올 거란다. 종종 있던 일이니까. 무의식이 느낀 싸한 예감을 의식은 그렇게 밀어낸다. 그냥 알바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나 다음 모임에 관한 얘기나 하자는 거겠지. 의식은 나쁜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럴 땐 언제나 둘 중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곤 한다는 걸 의식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카페에 들어서니 둘이 같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사귀기로 했단다. 어쩌다? 언제? 그런 건 물어보지 않는다. 보나 마나다. 알았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쿨한 척은 거기서 끝이다. 카페에서 나오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오른다. 배신감? 후회? 문득 두 사람이 담배 한 개비를 나눠 피우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거 간접키스 아냐? 꼴초들 진짜…”

내 핀잔에 그녀가 빙긋 웃으며 담배를 내민다.

  ”너도 같이 해.”

나는 그 담배를 같이 피우지 않았다. 미처 피우지 못했던 그날의 담배 연기를 내뱉 듯 깊은 한숨을 쉰다. 그리고 모임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한 땡땡형에게 음성을 남긴다.

  "형. 술이나 한 잔 사줘요."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만난 땡땡형에게 빚쟁이처럼 독촉한다. 잠시 고민하던 땡땡형이 대답 대신 묻는다.

  "너 스무살 될 때까지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음... 그래.”

땡땡형은 또 고민에 빠진다. 갈 만한 술집은 도처에 널렸다. 뭘 망설이는 걸까. 얼른 소주 몇 잔 털어놓고 한탄과 하소연을 토해내고 싶은데.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만화에서 수없이 나온 그 장면을 마침내 내가 재현할 때가 왔는데.

  ”내가 사줄 수도 있어. 그런데 말이야..."

   뭘까. 나는 도로를 내달리는 차 소리에서 그의 말을 분리해내려고 귀를 기울인다.

  "안 좋은 일 있을 때마다 술 마시면 버릇된다."

   그의 말은 무척 근사했고 강렬했다. 보충 설명은 없었으나 단숨에 이해됐다. 좋은 날보다 안 좋은 날이 더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걸 개인적 통계로 알고 있었다. 이런 날 술 마시는 버릇을 들이면 마셔야 하는 날이 더 많아진다… 오늘은 그 방아쇠가 될 것이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들은 모두 깊게 각인되기 마련이니까. 첫 여친에 첫 배신은 평생 가져갈 기억이 될 게 뻔했다.

   그날 우리는 결국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후로도 나는 술을 기분 좋은 날에만 마셨다. 요즘은 가끔 평범한 날에도 마시지만 안 좋은 날에는 결코 입에 대지 않는다.

   이 소녀와의 기억은 까만 숏컷의 소녀와는 달리 수백 번도 더 마주한 것이다. 하지만 내 의식과 무의식은 그날 땡땡형과의 만남에서부터 기억을 재생한다. 까만 숏컷의 아이는 잊힐 정도의 아련함으로 무의식의 영역에 남았지만 긴 생머리의 그녀는 다소 교과서적인 인생의 신조-나쁜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를 끌어낸 의식의 영역에 자리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 기억하는가? 나는 대체로 무의식을 더 좋아한다. 오늘 내가 듣고 싶은 노래는 ‘단발머리’다. 이왕이면 015B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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