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 이름을 김재규로 만든 김에 김재규에 관해서 짧게 무언가 써보려고 합니다.
저는 김재규가 사형당한 이후에 출생한 사람입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한국현대사에 대해 얕게나마 공부를 한 이후가 되어서야 김재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장이었고, 박정희의 오른팔이긴 하나 나름 박정희 정부 내에서는 비둘기파라고 볼 수도 있는 인물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본 결정적인 계기는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된 이후였습니다.
비슷한 나이대 친구들처럼 저도 헬조선무새이긴 합니다만, 박근혜씨가 당선됐을 때는 정말 헬조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습니다.
직접적으로 박정희나 박근혜가 저에게 피해를 준 것은 없습니다만, 국가가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양 행동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왕조시대도 아니고,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정치 지도자로서 대단한 식견을 보여주거나 상당히 영민한 사람이란 인상을 준 적도 없는데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대통령이었던 사람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는 것을 보고 참담했습니다.
그래서 김재규라는 인간에 더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유신의 심장을 쏜 사건은 마치 제게는 세상의 규칙을 '리셋'한 일 처럼 다가왔습니다.
치솟는 물가와 집값에 허덕이던 저는 어떻게든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 주식에 손을 댔고,
물론 주식은 쏠쏠하게 지금도 잘 되고 있긴 합니다만 대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주식으로 어느정도 돈을 벌어도 결국 내 이름으로 된 집 한채도 구하기 어렵고,
직장에서는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상사들, 판단할 근거는 없지만 나보다 그닥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월급만 많이 받아가는 것 같은 상사들에 대한 피곤함이 가득했습니다.
김재규처럼 이 모든 세상을 '리셋'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에 한동안 빠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친구들과 게임하면서 김재규 어쩌구 하는 아이디를 쓰면 이런저런 반응이 나옵니다.
재밌다는 반응도 있고, 코렁탕 먹는다는 반응도 있고, 김재규에 대해 니가 뭘 알고 깝치냐는 반응 등등.. 주변 사람들도 비슷했습니다.
일단 김재규에 대해 좀 알자고 해서 찾은 책이 안동일 변호사의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 였습니다.(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942075)
안동일의 책은 MBC 제4공화국 드라마의 김재규처럼 김재규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안동일이 직접 김재규를 변론하면서 만난 에피소드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김재규의 10.26 사건 직후 사건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지난해 말 촛불집회가 일어나기 전부터 최태민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만,
안동일의 책을 통해 김재규란 사람은 사실 박정희에 대한 충신이었단 점도 알게 됐습니다.
박정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박근혜와 박지만이 최태민과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박정희에게 쓴소리를 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김재규였습니다.
유신이 말기로 흐르면서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높아지고 있을 때 그것을 박정희에게 전해준 사람 역시 김재규였습니다.
어쨌든 김재규는 유신을 종말시킨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새 시대를 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진심인지는 누구도 알수 없습니다.
이왕 자신의 거사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마당에 역사 속에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 자유민주주의니 뭐니 하는 말을 감옥 속에서 지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농반진반으로 김재규가 혁명가다 뭐다 떠들던 저는 안동일의 책을 읽은 이후 '김재규=혁명가'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게 됐습니다.(게임 아이디는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한국 사회에는 지금도 회사, 모임 내에서 자신이 무슨 세기의 위인이라도 된 양 행동하는 '작은 박정희'들이 많습니다.
제가 코인판에 뛰어들어 대박을 치는 날이 있다면 저를 피곤하게 하는 여러 사회관계에서 이탈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체제 안에 살아야 한다면 최소한 김재규처럼 순응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갖고 있습니다.
김재규를 혁명가라고 생각하고 흉상도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체제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호의호식을 누리다가 조용히 은퇴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의 면전에 대고 할 말은 했던 모습, 자신이 가졌던 것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결단력.
그런 면 때문에 김재규와 동시대를 전혀 살지 않았음에도, 김재규란 인물에 대해 잘 모름에도, 김재규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