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입니다. 아이스 커피 한 잔을 쪽쪽 빨며 처음으로 블록체인의 개념을 들었을 때 저는 눈이 휘둥그레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 때의 기분은 꼬마였을 때 바둑을 처음 배웠을 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간단해 보이는 룰, 그러나 그 룰이 이루어 낼 파장. 그 때는 블록체인의 개념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역사적 흐름도 전혀 모를 때였습니다.
그 다음날 코인을 거래할 수 있는 곳을 뒤적거렸고, 마침 한국의 첫 거래소라고 하는 코빗 거래소를 두드렸던 것 같습니다. 저의 코인 거래는 그렇게 단숨에(?) 이루어졌지요. 아마도 거래소라는 곳에서 무언가를 매수하고 매도하는 데는 많이 익숙했기 때문에 순식간의 몸빵이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비트코인을 먼저 사둔 후 제 나름대로의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블록체인이 무엇인지, 또 비트코인이 어떤 것인지 이것저것 파악을 해본 후 매입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이었겠지만 저는 그 반대였던 셈입니다. 그렇다고 '묻지마 투자'는 아니었고요. 여하튼 너무 엔지니어틱하게 접근하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라 제 나름대로의 상식 선에서만 이리저리 찾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읽을만한 책은 없었던 것 같고, 그 때는 또 스팀잇이 나오기 전이라 나름 코인 투자의 선봉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개념을 좀 잡아갔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는 그저 '주워듣기'에 급급했던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제 나름대로 확신했던 것은 어디선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둑을 두는 것처럼 머지않아 여기저기 블록체인 기술이 우리의 문명에 스며들어 있으리란 것이었죠. 어찌보면 그리 틀린 예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 그렇게 우리 생활 속으로 퍼진 것처럼 블록체인의 세상이 이루어 진다면 당시의 비트코인 가격보다야 오르면 올랐지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처음으로 투자를 해보게 된 이유였고, 옵션처럼 시간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설사 투자금을 날리더라도 그리 한 방에 날리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날려봐야 -100%, 옵션 매도처럼 권리 행사자의 요구에 맞춰 무한에 가까운 손실을 지어야 하는 위험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블록체인 기술이 스며들기도 하고, 자리잡기도 하고, 냉대 받기도 하고, '중앙화'라는 효율적 영역에 일부 밀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왜 이 블록체인 기술을 여전히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트레이딩'이라는 습관적인 사고 방식을 빼고, 또 엔지니어가 아닌 만큼 너무 기술적인 사고 방식을 뺀다면 제가 이 개념을 사회적으로 볼 때 여전히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으니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나름대로 매료되었던 것은 '공정한 분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예를 들어 볼까 합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두 계층의 승객들이 서로 모여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급 음식과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춘 상류층 거주 공간, 그리고 바글바글 모여있는 하류층의 거주 공간이 있지요. 그리고 이것을 상징하는 가장 큰 볼거리 들을거리로서 각 계층이 듣는 음악이 나옵니다. 바로 클래식, 그리고 민속음악이죠.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똥덩어리'를 외치던 강마에가 얘기합니다.
- 클래식? 그거 원래 귀족들을 위한 음악이야. 서민의 음악이 아닌거지.
네, 맞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기본적으로 귀족의, 귀족에 의한, 귀족을 위한 음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모두 복장을 갖추고, 격식을 갖춰야 합니다. 교양이 철철 넘치는 말과 행동으로 한껏 위세를 부려야 하지요. 작곡과 연주, 감상과 품평에 모두 정교한 룰이 있습니다. 그 룰을 배우고 이해하며 생산하고 소비하는 집단은 바로 왕족과 귀족들인 것입니다.
지금의 '경제적' 관점으로 이 클래식이라는 음악을 살펴 본다면 매우 단가가 높은 예술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서민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지요. 비싼 표 값을 감당하고 초대를 받을 수 있는 재력이 없이 어떻게 악사와 가수들이 전하는 음색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소수를 위한 음악, 소수만의 향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에, 주인공 디카프리오를 포함한 타이타닉의 빈민층들은 거리의 악사 출신같은 악공들이 벌이는 즉흥적인 파티를 즐깁니다. 악기라고 별거 있나요? 그저 낡은 바이얼린 한 대, 그리고 아코디언 한 대... 왠지 악보라고는 본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을 것 같은 악사들의 손 끝 연주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박수와 쿵쿵거리는 발굴림으로 장단을 맞추며 춤을 추지요. 이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앞의 클래식 음악에 들어가는 비용보다야 매우 저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지는, 적어도 '대중사회', '매스 미디어' 사회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멋진 성악가와 뮤지션이 펼치는 음악을 극 소수만 만끽할 수 있었고, 달리 말한다면 '소수만이 생산과 소비, 부가가치를 향유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대중 사회, 매스 미디어의 세상은 타이타닉 같았던 세상을 일거에 뒤집기 충분했습니다. 대중 사회는 일종의 '뿜빠이' 사회입니다. 이제 음악은 클래식을 벗어나 조금 더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타일로 바뀌었고, 영상 매체물이 그 대중화의 불씨를 당겼지요. 수십 억, 수백 억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하는 영화 작품을 우리는 그저 1만원 정도의 돈을 '뿜빠이'해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름 '아날로그' 세상에서도 다량의 찍어내기를 통해 공급과 소비 단가를 낮춰주었지만, 이것이 '디지틀'의 세상으로 탈바꿈하면서 정말 무한에 가까운 복사가 가능하게 되었지요. 여러분도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언제 부턴가 영화에서도 '디지틀 자막'이란 것이 생겼습니다. 제가 듣기론 그 전에는 자막도 복사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자막도 일종의 필름이었나 봅니다. 그것이 디지틀화 되면서 무한 복제가 가능해진 것인지.. 여하튼 영화를 상영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게 줄었다고 하네요. 세상은 이렇게 점점 더 저렴한 '뿜빠이'의 세상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나치게 '디지틀'화 된 세상이었습니다. 0과 1의 향현. 0과 1의 복제. 음악이든 영상이든 모든 창작물들이 그저 0과 1의 숫자 코드로 바뀌면서 줄줄이 무한 복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인터넷 세상이 열리며 이러한 복제는 지구를 넘나들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런 사회가 열리면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창작자, 공연자의 피해였지요.
누군가가 중세 시대의 유명한 테너나 소프라노였다고 해 봅시다. 이 사람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귀족들도 꽤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테너 또는 소프라노의 명성은 그들만의 그라운드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한 공연의 수입이 얼마나 컸을지는 모르지만, 대개 왕족이나 귀족들의 후원에 의지했던 것으로 압니다. 100군데에서 공연을 하면 그저 100번의 공연일 뿐입니다. 하루에 10탕을 뛸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아침에 런던에서 공연하고 점심에 베를린에서 공연하고 저녁에 모스크바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리적 시간적 한계에 부딪히지요.
그런데 대중 사회에서는 그 위상이 메가급으로 커지게 됩니다. 음반을 제작하고 필름을 만들면 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제작한 다량의 상품을 대중에게 또는 대중 매체를 통해 전파합니다. 노래를 한 번만 잘 불러서 녹음해두면 두고두고 쓸 수 있죠. 이제야 비로소 대중 예술가 또는 제작자는 큰 돈을 벌고 위상을 얻게 됩니다. 파바로티의 강렬한 목청이 전 세계 어딘가에서는 울려퍼지고 있었겠지요.
이런 주도권이 일시에 무너져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건이 바로 MP3쯤 되었을겁니다. 완전히 디지틀화된 파일이 그저 자료 복제와 자료 전송으로 넘나들게 된 것입니다. 이쯤되면 '소리바다'가 나오죠. 이 소리바다 서비스를 둘러싼 창작자들과 일반 소비자들의 논쟁이 21세기 초의 화두였습니다. 신해철이 울부짖었던 것 같네요.
- 누군가가 피땀흘려 이루어낸 창작의 고통이 다른 누군가에게 그저 복사 한 번으로 소비되고 버려지는 공짜의 대상으로 전락하다니..
디지틀 파일, 인터넷, 공유, 공유, 공유... 세상은 이렇게 180도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공유'란 이름으로 밟힐 수밖에 없던 창작물들은 나름대로 보호막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대규모 유통 업체였지요. 이 대규모 유통 업체와 플랫폼 회사들은 이들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일부, 또는 전부 사들이고 유통에 관여합니다. 이런 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나마 '유료 판매'로 자리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료.. 창작자들이 원했던 것은 창작의 고통에 대한 합당한 댓가였습니다. 그러나 유료이긴 했지만 '합당'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 잘 압니다. 아주 잘 알죠.
제가 사랑하는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인터뷰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 저는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악가이며 세션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작품에 대한 수입은 정말 말씀드리기 조차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제가 이 정도면 이 바닥에 다른 분들이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는지는 안 봐도 뻔합니다. 아주 처참하지요.
창작의 댓가는 대부분 유통업체, 그리고 플랫폼 회사가 거두어 들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갑질'이 판을 치지요. 그러나 어떡합니까? 이런 유통망이라도 없으면 말입니다. 슈퍼 울트라 캡쑝 뮤지션인 신대철이 이런 업계의 관행에 반기를 들고 직접 생산자(창작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려는 자생적 유통망을 만들어 보려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종의 직거래인지도 모르죠. 아마 직거래를 통해서는 양쪽이 다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직거래가 매우 소소한 비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 사회이지만 전혀 대중적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아직도 네이버나 멜론 같은 큰 플랫폼과 유통망만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몇 달 전에 코파시님으로 부터 EOS의 Emanate라는 댑을 소개받은 적 있습니다.
뭐, 대충 감이 오실겁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 되는 곳입니다. 아, 물론 '직거래'라고 하기도 좀 이상합니다. 그저 음악을 틀고 들으면 됩니다. 누군가는 반대로 음악을 틀어주고 배포하겠죠. 그저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또 좋은 음악을 들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기록되고 계산되며 평가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 공정하게 수익이 분배됩니다.
듣는 쪽, 그리고 배포한 쪽.. 어떤 비중을 두느냐는 약간의 선택일 뿐, 중요한 것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기록되어 분배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스팀잇이 글을 쓰고 평가하고 분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느끼고 있는 블록체인의 힘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흘러왔나 봅니다. 소수를 위한 세계. 그러다 너무 지나치게 대중을 위한 세계. 소수일 때는 그 소수만이, 그리고 지나친 대중 사회에서는 그 핵심을 쥐고 있는 또 다른 소수에게... 모든 권력과 그에 따른 이익은 편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누군가가 희생이 되거나 서러움을 겪어야 했죠.
그러나 블록체인은 이러한 양 극단적인 상황에서 균형점을 찾아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불특정 다수가 모인 세상. 그러나 합의 알고리즘이라고 하는 룰, 그리고 이기적인지는 몰라도 이 연결망에 기여하는 사람들...
물론 이것 역시 이상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변해왔지요. 굳이 변증법 뭐 이런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세상은 그 나름의 약점과 모순점에 의해 또 바뀌고 발전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