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게도 생명이 있을까?

ha-neul(17)
Published in
#kr-art
Words
387
Reading
2 min
Listen
Play
8y

태어나서, 자라고, 번성하고, 그러다 쇠락하고, 마침내 죽는 그런 삶이 존재할까? 지난 주 성북동 자락에서 열린 고사리 (Sari GO) 작가의 전시회를 갔다. 100년이 넘은 일본식 양옥은 이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실은 거의 죽어 있었다. 지난 십이 년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폐가였다. 작가는 집 안에 있는 온갖 쓰레기와 오래된 가구, 주저앉아 내려앉은 집의 흔적들을 드러내고 집의 구석구석을 비닐로 하나 하나 단정하게 감쌌다. 마치 염을 하듯 집의 마지막 단장을 했다.

작가는 이 집에 마지막 시간을 주고 있었다. 아마도 이 집은 곧 허물어질 것이다. 세상에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사라지듯이. 그리고 그 마지막을 보려고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찾아와 기억하고, 이 집의 시간들을 같이 느낀다. 나는 장례에 참여하듯 이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집의 삶과 죽음 속에서 내게 주어진 생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을 자꾸만 들여다 보았다.

지난 토요일은 날이 좋았고, 여럿이 같이 찾은 터라 집 앞의 너른 마당에서 같이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혼자 보기 아까워 오늘은 추적추적 비를 맞고 있는 집을 건축가 임형남 (Im Hyoungnam) 선생님과 함께 찾았다. 고 작가에 의하면 이 집은 원래 일제시대 작곡가 채동선 선생이 살던 집이다. 6.25 전쟁 중 채동선 선생이 돌아가시고 집은 비어있다가 이화여대 김용서 교수님의 자택이 되었다. 선생은 여기서 아이를 낳고 아이가 결혼을 할 때까지 사시다 지방으로 내려가셨다고 한다.

형남 형은 집의 외양에서 작은 단서를 찾아 이 집이 성장해온 시간, 지나온 역사를 추정해 주었다. 집은 이 집에 머문 사람들의 삶의 굴곡과 욕망을 따라 몇 번의 탈바꿈을 하고 계속 변해왔다. 마루를 없애고 정원이 보이는 거실을 확장하고, 새로 방을 들이고, 벽에는 벽돌로 마감을 다시 하고, 보일러를 깔았다. 창틀은 언제 설치했는 지에 따라 여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문간의 작은 집은 세를 주기 위해 방을 더 내어 넓혔고, 대신 앞집을 사서 남측의 좁은 정원을 크게 넓혔다. 아마도 일본인이 집을 짓기 전에는 한옥이 지어져 있었을 것이기에 한옥에 쓰였을 큰 돌도 집 계단의 재료로 남아있었다. 사람만 키가 크고 자라는 것이 아니다. 집도 자란다. 그리고 사람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듯 집도 허물어진다.

고사리 작가의 작업과 임형남 선생의 설명이 어우러지니 집은 뚜렷이 생명을 갖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집을 보았지만 집을 통해 시간을 보았다. 탄생과 소멸의 서사를 보았다. 공손하게 하나하나 감싼 얇은 비닐이 바람에 떨릴 때 마다 집은 내게 이야기를 거는 듯 했다. 대단한 삶만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기억할만한 삶이다. 그저 사라져도 되는 삶이란 없다. 물론 우리 모두는 사라진다. 기억은 사랑 속에 존재할 뿐 영원히 남는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게 손 내민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한다. 이 순간은 분명 단단한 실체니까. 나도 내 옆의 소중한 모든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