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앤이라는 존재는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하는 정도의 노래만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존재였다. 다른 책을 찾으러 서점에 들렀다가 밀리의 서재에서 자주 추천 하던 책이어서 제목 정도는 기억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걸 베스트 셀러에다가 평이 너무 좋은 것이 아닌가.
사실 남의 평을 보고 책을 사지도 않는 나였고 내가 좋은 책을 읽기 바빴다.
요즘 책을 읽으면서 부터 남들이 왜 많이 읽게 되었을까 그런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해서 5권 중 1권 정도는 읽기로 결심했었다.
사실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빨강머리 앤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다.
지금 이렇게 책을 읽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책을 읽지 않았다.
독서를 많이 하시는 어머니 덕에 집에는 항상 책이 가득했지만, 나에게는 그냥 벽면 한쪽이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가치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빨강머리 앤이라는 이야기는 더욱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저자에게 앤이라는 존재는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가치였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 때나 괴로울 때에 읽으며 위로 받는 책인 것 같았다.
저자가 설명한 앤은 고아원에서 생활을 하며, 남매에게 입양이 되지만 키운다기 보다 농장일손을 위한 입양이었다. 하지만 앤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아이어서,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아이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인 셈이다. 앤의 대사중에는 '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
라는 말을 보고 어쩜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 이것을 긍정의 힘이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바보같다라고 생각해야 할지 솔직히 고민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았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솔직히 나쁘지 않다. 그리고 한국도 아닌 호주에서 우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어릴 떄 보는 만화 영화가 이렇게 수준있고 철학적인 이었다니..
앤의 이야기 중에는 매튜 아저씨가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매튜 아저씨는 앤에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고, 언제나 앤의 편이 되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저자는 매튜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면서 책 '윤미네 집'을 소개했다.
아버지의 눈으로 찍어낸 딸의 기록이다. 태어났을 때 부터 딸이 결혼하는 그 순간까지 사진들이 담겨있따고 한다. 저자는 필히 아저씨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앤을 이런식으로 성장기록을 했을 것같다고 한다. 그러고 앤은 훗날 자신을 추억하며 사진을 보다,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깨달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진들 속에서 정작 매튜 자신의 얼굴이 없다는 점.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다들 엄마랑 친하다지만, 물론 나도 엄마랑 친하지만 아빠랑 더 친하다고 말을 한다. 맥주친구 치킨친구. 나는 우리 아빠가 그런 인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아마 아빠도 그렇게 우리를 뒤에서 묵묵히 바쳐주고 계셨을 것이다. 너무 감사하고 뭉클해 버스안에서 임에도 불구하고 울컥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마음에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특히 에필로그 부분. "이 전환점을 돌면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난 그 뒤엔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라니.. 힘들고 지친 나에게 정말 위로가 되는 한마디였다. 어쩌면 희망적인 말이기도 하고 말이다.
저자는 적어도 열번이상 앤을 정독한 사람으로서 앤에게 '내가 살아보니 꼭 그런건 아니야.' 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다. 앤처럼 우리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른다. 사소한 것부터 치명적인 실수도 있을 수 있다. 내 두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 바꾸거나 돌이키고 싶은 순간들 말이다.
저자는 이제 과거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과거의 '의미'는 내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고 한다. 솔직히 이 마지막 말에 많이 울었고 많은 생각에 잠긴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은근하게 왕따를 당하는 , 소위 말하는 '은따'였다.
한 학년에 2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하면, 그냥 동네 외톨이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실 많이 도망 가고 싶었고, 할 수 있다면 도망 다닐 수 있을 만큼 도망다니고 싶었다. 나에게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라는 생각이 더 크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따금 우울하고 힘들 때엔 그 기억들이 한없이 나를 밑으로 가두는 느낌이었다. 나는 과거를 받아 들이는 데에 오래걸렸다.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때의 기억이 25살 까지 나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피폐해져만 가고 어두워지기만 하는데 오히려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은 더욱 더 괜찮은 삶을 준비하고 살고 있었다. 그 때에 아차 싶었던 것 같다. 나를 기억도 못하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내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임을 알았다. 그 후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완벽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찾고 하고 있다. 아직도 이따금 어린 시절 내가 슬퍼하는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다독여 줄 수 있을 때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를 보듬어 줄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생각해보게 해준 이 책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