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질문이 내겐 참 쉽다. 고민할 것 없이 M이다. 나의 베프, 중학교 때 만나 고등학교 때 친해진 14년 지기 친구. 우리는 비록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고 일상을 시도 때도 없이 공유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에 대한 무한에 가까운 믿음이 있다. M은 내가 범죄자가 돼도 나를 지켜줄 것이라 말했고 나는 M을 위해서라면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도 함께 여행을 간 적 없었다.
나는 주로 혼자 여행을 했고 그녀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바쁘기도 했지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여행 가면 꼭 싸우게 되고 원수가 되어 돌아온다라는 심심찮은 풍문을 들었고, M과의 우정도 미묘하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백수가 된 어느 날 우리는 함께 제주도를 가기로 했다. 여행을 가지 못할 이유는 많았다. 돈이 없었고 백수 주제에 한가하게 여행을 즐길 처지도 아니었다. 또한 둘 다 운전을 못해서 렌터카도 빌릴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라면 떠날 수 없을 거라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거리낌 없이 우리는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봄이 오기 직전의 제주, 좋았던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연인이 가득한 협재 해수욕장 우리도 질 수 없다며 나뭇가지로 '10년째 만남중'이라는 유치한 문구를 쓰고 그 옆에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어깨동무를 한 채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을 했다. 우리를 바라보던 그들의 묘한 눈빛을 읽고 키득거렸다.
비자림. 나는 스토커가 된 듯 모든 순간을 담아보겠다며 그녀를 향해 백만 번쯤 셔터를 눌렀다. 인생 사진을 찍었다며 좋아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숲을 거닐어도 그녀의 마음이 다 느껴졌다.
버스를 놓쳐 커다랗던 민트색 캐리어에 털썩 주저앉아 함께 듣던 음악, 기다리고 헤매며 고작 하루에 관광지 두 개도 가지 못하는 허술하고 비효율적인 우리의 여행이 좋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조차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 여행을 통해 몰랐던 그녀를 그리고 몰랐던 우리 관계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온천으로 유명한 산방산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서 묶기로 한 저녁이었다. 유채꽃 밭에서 한참 신나게 사진을 찍고 돌아온 우리는 상기된 채 짐을 풀고 있었다. 그때 우리 방에 묵는 여행객이 들어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나누고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웃었는데 어쩐지 친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날 저녁 바비큐 파티에 참석해서 둘이서 먹지 않던 술을 마셨다. 나는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는데 친구가 앉은 테이블은 대학생 MT에 온 듯 끊임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 날 친구의 취한 모습을 처음 봤다. 얼굴이 멀쩡했던 내 친구는 만취하자 애교가 많아졌다. 그리고 했던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런 친구가 신기하고 낯설어 한참 바라보았다. 내가 숙소로 돌아가자 달래니 그녀는 역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툭 튀어나온 그녀의 진심.
너 너무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친근하게 대해. 나랑 차이가 없잖아!
무슨 소리지? 아 아까 낮의 처음 만난 여행객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랬어? 우리 OO 속상했어?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그 비슷한 대화를 그날 밤 네 번은 했다. M도 내게 서운할 때가 있구나. 다른 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하니 질투가 나기도 하는구나. 물론 다음날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술버릇을 말하니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부끄러워한다. 평소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M에게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면 꼭 술을 먹으라고 말했다. 술에 취한 그녀는 빈틈이 너무 많고 귀여워서 혼자 보기 아쉬웠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작은 공연을 하던 날, 우리는 단 둘이 카페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리고 곧 정전이 되었다. 노랗고 작은 촛불을 바라보며 마치 둘만의 캠프파이어를 하듯 담담히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M. 이번 여행을 하며 너무 놀랐어. 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털털하고 강하고 까다롭지 않더라고. 아무데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고. 너 되게 편안한 동행이야.
-그러니깐 억울해. 내 첫인상 때문에 늘 고민이야. 너처럼 편안한 이미지면 좋겠어. 내가 어려워 보인데. 새침하다고 오해받는 게 스트레스야.
-정말? 전혀 몰랐어. 나는 네가 그런 첫인상과 다른 게 더 매력이라고 생각해. M 나는 너를 너무 좋아하지만 가끔 내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어딨어?
-모르겠어. 나도 네가 어려운가? 가끔씩 네가 너무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도 연락을 망설이게 돼. 혹시 방해가 될까 싶어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너무 지나치게 배려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앞으로는 마구 전화해야겠어.
여행을 하고 나서 우리 사이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깊숙해졌다. 다음번에는 걱정없이 떠날 것이다. 여행은 함께해도 좋다. 몰랐던 서로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이 될 테니깐. 사랑하는 사람은 여행이 지나온 자리만큼 더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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