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물욕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확신 없이 무언가를 구매하는 건 즐겁지 못하다. 쇼핑에 있어서 빨리 마음을 정하는 타입 그래서 구매하고도 잘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도 물건도 직감을 중요시한다.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느 정도의 마음에 정해 둔 선을 충족하면 불이 들어온다. ‘이 거다.’란 생각이 들면 어차피 답은 정해져 버린다. 다른 거 볼 필요 없다. 그냥 구매해 버리지.
잘 모르는 걸 구매하거나 선택할 때는 그래서 곤란하다. 아는 게 없으니 직감 같은 게 느껴지지 않고 어쩌다 떠밀려서 선택을 한다. 그 느낌 자체가 즐겁지 않다. 그래서 남자 맞춤 정장에서 물어보는 여러 대답도 곤란했고 드레스 투어도 피곤했다. 아무리 봐도 뭐가 좋은 지 내 마음조차 모르는 불완전한 경험.
어제의 마지막 코스는 예물이었다. 장소는 플래너님의 추천에 의해 한 곳으로 이미 정해졌다. (나로서는 샵이니 예물이니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플래너님을 믿는다 길을 제시해주는 고마운 분!) 감각적이나 가볍지 않은 인테리어의 샵 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에서 보석 디자이너이자 CEO님을 만났다. 몇 살인지 잘 가늠이 안 되는 아마도 중년의 남자. 동그란 우드 뿔테 안경 속 눈에는 확신이 있으나 얼굴 사이 보이는 주름살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풍기는 이미지에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넘쳤다. 영업에 어울리지 않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
나는 누구나 그렇듯이 영업사원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물을 고르기 위한 상담을 약 한시간쯤 했다. 뭐라고 할까… 그건 확실히 내 생각과는 다른 색다른 경험이었다.
먼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남자친구의 소재에 대한 질문에 그는 아주 자세하고 쉽게 한참을 설명했다. 우리의 예산안을 말하고 어떤 목적으로 웨딩링을 찾는 지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을 테니 반지함에서 맘에 드는 반지를 골라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닳고 닳은 듯 지친 표정으로 조심스럽지만 완고하게 상담가로서 상담을 해줄지 디자이너로서 조언을 해도 될 지 정해달라고 했다. 언제나 좋은 말 보다는 진실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그가 딱 한마디만 말했어도 쉽게 디자이너로서 조언해달라고 결정했을 텐데.. 그의 설명이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당신의 진짜 생각을 말해달라고 했다.
그는 최대한 쉽게 반지를 보는 법을 하나씩 비교하며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저 예뻐서 고른 악세서리는 얼마나 엉망인지도. 나의 원래 목적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 엉터리라는 것도. 결국 예산에 맞춘 범위내에서 그가 추천해준 아무 무늬 없는 6개의 디자이너 반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고르면 되었다. 그리고 그 반지는 세상에서 내가 껴 본 반지중에 가장 아름답고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지만 내가 원하던 그런 반지. 마치 아이폰의 탄생처럼. 그렇다 때로 고객은 자신이 뭘 원하는 지도 잘 모른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 게 뭔 지도 모르는 내게 내가 원하던 완벽한 반지를 보여줬다.
그는 뉴질랜드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한국 사회는 너무 바쁘고 빠르다고.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고했다. 정말이지 그는 지쳐 보였다. 20년 넘게 이 계열에서 쉼 없이 일했다고 했다. 미국에서 보석 애널리스트였다가 디자인에 관심이 있어 디자인을 새로 배웠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한국 웨딩 예물 시장이 너무나 엉망이고 영업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돈을 벌려면 영업을 해야 했지만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방식이 한국에서 5년동안 통하지 않았다. 뉴욕에서 나름 유명하고 잘나가던 디자이너였지만 한국에는 한국의 방식이 필요했다. 1년 동안 반지를 20건 밖에 팔지 못했다고 했다. 5년간 지지부진하던 매출..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방식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인터넷에서 유명해지고 오히려 그의 남다른 방식으로 인해 그는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바빠졌다.
다른 집은 경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자신은 너무 바쁘다고 담담히 말했다.
자신도 너무 힘들 때 자신도 타협을 했었다 고백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엉망의 예쁜 디자인의 반지를 팔았다고 한다. 그때 고객을 생각하면 미안하다고
그는 말했다. 어차피 다 레드오션이니 블루오션 찾지 말고 그냥 1등하면 된다고. 똥 푸는 걸 해도 1등하고 싶었다고. 그리고 40살까지는 자신의 기량을 쌓는 시기이고 돈은 40~50살까지 10년간 다 버는 거라고 했다. 자신의 삶이그러했다고. 한 가지를 뚝심 있게 꾸준히 하라고.
나는 이토록 자신의 일에 장인정신을 지니고 있으며 제대로 소신 있게 자신을 속이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에게 늘 끌릴 수밖에 없다. 그러한 예술가들이 만든 마스터피스에는 가성비란 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물은 단순히 그 제품 하나가 아니라 그의 인생과 철학이 담겨있으니까, 그의 삶의 궤도가 고스란히 녹아 가치가 무한대인 결정체이자 상징이 되어버리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더 이상 가격에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게 된다. 그건 그가 만든 길을 응원하고 그를 지지하고 경탄하는 의미, 그저 단순한 구매 행위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3달 후에나 받을 수 있는 그의 반지를 만날 생각을 하면 벌써 설렌다.
내 인생에 마스터피스를 하나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