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다.’라는 건 그 세계에 의심없이 몰입해 빠져들었단 말이다.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가 내 안으로 거부감없이 밀려들어와 개인의 언어와 감정으로 재해석된다. 실제처럼 그 세계를 경험한다. 찬찬히 누군가가 공들여 설정한 값에 주파수를 맞추고 흐름에 말려든다. 대강의 역사 빈약함 의문을 남기는 가공인물에 마음을 쏟고 감정을 나눈다.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에게도 세계를 재창조할 힘을 준다. 모든 이야기와 모든 예술은
자각하기 위해 현재에 살기위해 깨어 있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단 걸 알면서도 늘 이야기를 찾게 된다. 현실에서 멀리 의식을 띄어 놓고 강렬한 흡입력으로 자아가 흐려지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책이 좋다. 영화가 좋다. 만화가 좋다. 웹툰이 좋다. 음악이 좋다.
20대 초반에 내 주위 가장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사계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예술가 Y는 영화관에 가는 거만큼 바보스러운 건 없다고 했다.
“왜?”
의례 묻는 질문이 아니다. 알고 싶어서 물었다. 그 답이 정말로 듣고 싶었다. 몇 분 간 고민하던 Y는 조용하고 단호하지만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를 담아 대답했다.
“깜깜한 공간에 갇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 느낌이 끔찍해.”
이제와 생각해보니 당연하다. Y는 허구의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면 충분… 아니 본인의 현실이 훨씬 흥미로울 것이다. 깨어 있는 자에게 거리를 둔 채 장시간 객체로서 감흥없이 모니터를 바라봐야 하는 그 긴 시간은 고문과 다름없겠지. (Y는 음악을 참 좋아했지만, 듣는 것 만큼 부르는 걸 좋아했다. Y 덕분에 자미로콰이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언젠간 ‘G-Dragon은 예술가야. 뭘 좀 아는 것 같아’란 실없는 말을 진지하게 나눴다)
에쿠니 가오리의 다른 소설에는 관심 없지만, 고교시절 처음 읽었던 ‘반짝반짝 빛나는’이란 소설을 참으로 좋아했다. 책장을 넘기면 변형되지 않고 영원한 한 세계의 시절이 박제되어 있다. 그들은 늘 그대로다. 쇼코, 무츠키, 곤. 시간이 지나 그들을 잊고 무심결에 다시 찾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들려준다. 그게 위안이 된다. 독립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
고등학교 시절에는 비정상적인 설정에서 정상과 균형을 찾아가는 그들의 삶이 좋았다. 쇼코가 조울증을 겪고 별 거 아닌 일에도 예민하고 자주 울면서 강단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 삶이 나와 조금 닮은 것 같아서 좋았을 지도. 지금에 와서는 늘 자신과 애처롭게 싸우는 쇼코가 안스럽지만 곧 괜찮아질 걸 알기에 마음이 아프진 않다. 그때도 쇼코는 무츠키를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지금도 같다. 참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들은 그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나갈 따름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누군가에게는 자연과 음식, 엄마와의 추억이. 쇼코에겐 은사자 공동체와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별이 자신의 안식처이다.
도망가지 않는 동시에 집착을 버리고 감정과 분리해 명료하고 평온한 자아의 해방을 원하지만, 마음 속 동요를 잔뜩 일으키는 이야기 속에 빠지는 법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적당히 그 세계를 감상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역시 바보처럼 몰입해서 그 세계가 끝나면 현실도 끝나리만큼 미련하게 동일시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포기할 수 없이 짜릿하다. 이야기 중독자. 이 쾌감을 끊기란 역시 쉽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