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오늘이 아니어도 가끔씩 생각나는 선생님들.

Words
976
Reading
5 min
8y
Listen to this post
~7 min

스팀잇대문.jpg


학창시절에 만난 선생님들 중에 지금까지 나쁜 기억으로 남은 분들이 없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운을 타고난 것 같다. 사랑의 매는 맞아봤어도 손찌검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총 12분의 담임선생님 성함을 까먹지 않고 기억했었는데 이제는 몇 분의 이름이 생각나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그분들에게 나쁜 기억이 있는 건 아니다.

기억을 거슬러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성함은 다 기억이 나는데 중고등학교 선생님, 두세 분의 성함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그건 같은 크기의 기억을 담는 그릇에 어릴 때의 추억이 더 크게 자리 잡아서 일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세월 가는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하지 않나.

문득 생각나는 선생님들이 있다. 추억이 깃든 장소에 가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듯, 추억을 소환하는 장면의 끝에 서 계신 분들이 있다. 덧셈과 뺄셈에서 미분과 적분까지 지식의 가르침보다는 어른이 되어 안고 살아가야 할 마음들을 심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키다리 아저씨 같던 유치원 원장 선생님. 삐뚤삐뚤한 치열을 내보이며, 커다란 금테 안경 뒤에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봐 주셨다. 유치원에서 마무리될 것 같았던 인연은 학원으로도 이어져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아직도 동네 근처에서 학원을 하고 계신대 찾아뵙지를 못했다. 더불어 등하원 길을 책임져 주시던 봉고차 기사님도 생각이 난다. 운전석 뒷자리는 항상 나의 자리였고 걸 터 서서 장난도 많이 쳤고 많이 받아주셨다.

두 분 다 잘 살고 계시겠죠. 주름살이 많이 느셨겠네요. 미소가 아름답던 두 분, 주름살도 곱게 패이셨을 것 같다.


처음 학교에 간 날을 잊을 수 있을까. 시장에서 엄마가 사준 자석 단추가 달린 가방을 끌어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식 전날 밤을 보낸 것 같다. 처음 만난 학교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얼굴은 어렴풋하지만 목소리는 금세 알아챌 것 같다.

선생님에게 배운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노래다. 동요가 아닌 가요다. 우리는 두 노래를 수업이 들어가기 전에 하나를 부르고 수업을 끝마치고 또 다른 하나를 불렀다. 지난 남북정상회담이 있을 때 문득 그 노래가 생각이 났다.

저 산맥은 말도 없이 5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5천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돌아 동해로 접어 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나라
동해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몸이 태어난 나라 온누리에 빛나라 <신형원, 터>

가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사의 길이도 초등학생이 부르기에는 엄청 길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외우라고 강요하시지 않았다. 전지에 손수 두꺼운 매직으로 가사를 적어서 칠판 위 고리에 걸고 매번 넘겨 주시며 같이 불렀다. 이미 유치원 때 '개똥벌레'는 떼고 왔기에 가수 신형원의 노래가 낯설지 않았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것은 바위섬과 흰파도라네 <김원중, 바위섬>

내 인생에 노래방 100점을 안겨준 첫 노래. 눈 감고도 부를 만큼 많이 불렀다, 학교에서나 밖에서나. 사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지금 다시 가사를 보며 마음속으로 불러보니 몇 년은 더 살아야 알 것 같은 노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친구와 함께 전근 가신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100점 맞았노라 자랑을 했어야 했는데...선생님 취향이셨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지금도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실까. 교장, 교감선생님이 되셨을지도 모르겠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로 기억되는 4학년, 그때 나는 처음으로 부반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칠판 앞으로 나가 '떠든 사람'을 적어야 했다. 학급마다 꼭 한 명씩 말 안 듣는 놈들은 있게 마련이다. 무서운 선생님이 나가자 그 녀석은 또 난리부르스를 추었다. 정말 춤을 추며 꼬라지를 피웠다. 칠판에 이름을 적고 가벼운 경고를 날렸다.

계속되는 주의에도 멈추지 않자, 성미 급한 나는 손보다 발이 먼저 나갔다. 검빨띠의 발차기는 허리와 어깨를 지나 입으로 향했다. 잠시나마 정적이 흐르고, 경망스럽던 웃음소리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몇몇 아이들은 통쾌함에 나를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하필 그 타이밍이었을까...입술은 터지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일러바치던...아오...

평소 그놈의 행실을 선생님도 알기에 잘 타일러 들여보내고, 그 녀석에게 향할 줄 알았던 꾸중이 나에게로 찾아왔다. 학급에 모범이 되어야 할 부반장이 아이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며 나무라셨다. 그 당시는 굉장히 억울했다. 속담까지 더해 나를 꾸짖으시니 더 억울했다. 내 떡잎이 어떻다고...

내가 '될 성부른 나무'가 아니란걸 알아차리신 걸까, 아니면 '될 성부른 나무'가 되라고 꾸짖어 주신걸까. 지금쯤 가르침과 같던 물과 거름이 뿌리를 지나 줄기까지는 와닿았겠지. 이제 가지를 펼쳐야 할 텐데...


초등학교 때 반에서 5등은 유지하던 성적이 중학교 들어 더 떨어졌다. 흔히들 듣는 '머리는 좋으나 노력이 부족함'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뒷말을 새겨 들었어야 했는데 앞말을 믿고 싶었고 또 언제든 노력만 한다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나만이 듣던 말이 아닌 흔하디흔한 말이었다.

중학교 3년 내내 수학 과목에서 90점 이상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인수분해가 무어라고 그리도 어려웠다. 같이 어려워하던 내 친구와 나를 안타깝게 여기던 학원 수학선생님은 내기를 제안했다. 방과 후 수업이 아닌 등교 전 수업을 해줄 테니 해보겠냐고, 너네가 90점을 넘겨오면 밥을 사주겠다고.

내기에서 이기든 지든 우리에게만 얻는 것이 있을 뿐 선생님은 얻을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만삭에 예정일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가녀린 몸을 가졌던 선생님은 평상시 커다란 눈을 매섭게 뜨고 목소리는 까랑까랑했다. 물론 선생님을 그렇게 만든 건 우리들 탓이었다.

아침잠이 많아 9시에 등교하는 것도 버겁던 시절에 동이 트기도 전 우리 둘은 학교 대신 학원으로 향했다. 만삭의 몸으로 우리보다 더 일찍 나오셔 수업 준비를 하고 계신 선생님은 우리를 평소와 다르게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그게 선생님의 본 모습임을 알았다.

그렇게 둘만의 보충수업은 보름 가까이 계속되었고, 대망의 시험날! 보름 만에 깨우친 인수분해, 나는 수학 과목에서 90점 이상의 점수를 중학교 다니며 처음으로 맞이했다. 집보다 먼저 꼬리표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물론 나만 90점을 넘었다. 내 친구는 '머리는 좋으나 노력이 부족함'을 못 들었던 게 분명했다.

당시에도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은혜를 느꼈다. 어느 날은 만삭의 몸으로 첫째를 유모차에 태워오신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핑 도는 감사함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셔 우리 둘을 위해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을 하고, 또 댁으로 돌아가 다시 오후가 되면 학원으로 출근하시는 그 모습을 몇 년이 흘러서야 그려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인수분해 공식보다 더 한 것을 가르쳐주셨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말로 가르쳐준 것이 아닌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교훈이었다. 가끔씩 동네에서 선생님을 뵈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때 나는 왜 선생님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았느냐 친구에게 따져 물었다. 물론 몇 년이 흐른 이야기라 지금도 동네에 살고 계신지는 모르겠다.

선생님 뱃속에서 같이 수업을 들었을 둘째는 지금쯤 중학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동네에 살고 계시다면 꼭 마주쳤으면 좋겠다. 반가운 마음에 와락 껴안을지도 모르겠다. 품 안에 쏙 들어올 선생님 꼭 껴안아주고 싶다, 고마습니다라고. 아, 왜 또 눈물이 핑 돌까.

여러 선생님들이 떠오르지만 오늘이 아니어도 가끔씩 생각나는 선생님. 잘 살고 계시겠죠.

보고싶어요. 쎄오seo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