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dPXsociety의 One Shot One Kill_#1] 애니의 왕국엔 영화의 신이 살았다 - 일본 영화계의 전설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 아키라는 원래 미술학도였다. 권위있는 미술상을 받은 적이 있을 뿐만아니라 일본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에 참가하는 등 화가로서의 재능과 열정이 있었다. 영화와의 관계라면 그의 형이 당대의 유명한 변사였다는 것 정도. 그러던 그가 돌연 영화계에 투신하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 때가 1936년. 그의 나의 27세 되던 해였다.
1951년. 낚시를 마치고 집에 들어선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베니스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전화의 내용을 들은 그는 믿을 수 없었다. 1950년에 찍은 '라쇼몽(羅生門)'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라쇼몽'의 금사자상 수상은 구로사와 아키라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일본 영화계에도 충격이었다. 이것은 일본적인 것들을 앞세워 자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위대한 선배 '미조구치 겐지'와 '오즈 야스지로'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라쇼몽'의 감성은 모던하고 국제적이었다.
<라쇼몽>
물론 구로사와 아키라의 '국제적 감각'은 감독 자신이 헐리웃에 진출 하는 등 세계 영화계에 일본 영화를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겠으나 정작 자국에서는 '일본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차후의 비판이야 어떻든 '라쇼몽'은 영화계에 입문한지 15년, 감독으로 데뷔한지는 고작 8년 만에 구로사와 아키라를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다.
이후로 <백치>(白痴, 1951),<이키루>(生きる, 1952), <칠인의 사무라이>(1954), <거미집의 성>(1957),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 등을 연출하는 등 왕성한 창작욕을 보여줬으며 이 중 <칠인의 사무라이>는 54년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세계적인 감독으로 명성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이후 영화계에 등장한 유명 상업 영화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예를 살펴보면,
54년작 <칠인의 사무라이>는 존 웨인이 등장하는 <황야의 칠인>으로 리메이크 됐고
<황야의 7인>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두 주인공은 그 유명한 <스타워즈>의 R2D2와 C3PO의 모티브가 됐으며
<숨은 요새의 세 악인>
마카로니 웨스턴의 대부 세르지오 레오네는 그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요짐보>(1961)를 표절하기에 이른다.
<황야의 무법자. 요짐보의 제작사 토호가 소송을 걸어 전세계 수입의 15%를 가져간다!>
승승장구하던 구로사와 아키라도 1960년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한 후로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미 침체기에 빠진 일본 영화는 투자자를 찾기 힘들었고 특히 엄청난 비용이 드는 기획만 하는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사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다. 급기야 <붉은 수염>(1965) 촬영 당시 일본 영화계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도호 영화사와 관계가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폭주기관차>의 제작이 엎어지고 미일 합작의 <도라 도라 도라>(1968)에서마저 퇴출되면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러나 악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국에서의 부침 끝에 일본으로 돌아온 아키라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상 최초의 칼라 영화인 <도데스카덴>(1970)을 연출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만든 작품은 처음이며, 경쾌하면서도 가볍게 찍은 작품"이라고 얘기하며 마치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린 듯 초연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영화는 망했고 1971년, 그는 사무라이의 후예답게 자살을 선택한다.
일본인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뭔지 아는가? 자살 실패. 순식간에 피고 지는 사쿠라와 삽시간에 명멸하는 하나비(불꽃)를 숭배하는 일본이다. 깔끔하게 자결 할 수만 있다면 그 뒤의 문제는 거론치 않겠다는 것이 이 섬나라 사람들의 삶의 미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죽음의 안개를 뚫고 가까스로 살아돌아왔을 때 아키라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안도가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이 자존심 센 예술가는 그 후 몇 년 동안 영화계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도데스카덴. 도데스카덴이란 전차 운전사를 흉내내는 주인공이 입으로 내는 의성어이다.
우리말로 하면 칙칙폭폭 정도?>
그러나 아키라를 죽인 것이 미국이었다면 그를 살린 것도 미국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제자임을 자칭한 헐리웃의 백만장자 조지 루카스(스타워즈), 스티븐 스필버그(인디아나 존스) 그리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대부) 스승의 영화에 투자할 영화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심지어 영화사를 설득하기 위해 본인들이 금전적인 보증을 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물간 일본의 감독과 헐리웃 상업 영화 감독들의 어울리지 않는 우정. 그러나 이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1980년 <카게무샤>가 완성되고 이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라쇼몽>을 만든게 1950년이니 꼭 30년 만에,
왕이 귀환한 것이다.
<카게무샤. 왕의 귀환>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기의 감독으로 세계인의 추앙을 받다가, 1998년 뇌일혈로 삶을 마감한다.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평생 공로상을, 프랑스에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아카데미에선 공로상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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