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不信)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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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규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과열된 암호화폐 시장이 거기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금융시장의 유동성 공급과 버블 팽창,
그에 따른 규제의 확대와 완화는
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이슈입니다.
시장과 공권력 간의 공방전을 기록한 것이
곧 금융규제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요.

모든 규제의 핵심은
결국 최악과 최선, 모든 상황에 대비한 리스크 방지입니다.

요동치는 변동성의 회오리 속에서 공정성을 확보하면서도
시장 육성을 도모할 수 있는 완충장치로서
규제밀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써놓고 보면 당최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은 말이죠)

결국 이 모든 것은 균형감각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리스크도 감수하지 않으려면
그냥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최선입니다.
기존에 없던 시장이 형성될 때,
난해한 신기술의 적용에 따른 파급효과를 가늠하기 힘들 때
모든 것을 원천금지시키면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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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무 것도 안해야겠다...

그렇다고 시장자유라는 명목 하에
국가가 모든 것을 방임할 수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지난 두어 달 간 큰폭의 등락을 거듭하고 있는
암호화폐시장에서 국가의 사전 규제조치가 없었다면,
투자자 피해가 더 커졌을 거란 주장도
일응 설득력을 얻기도 했지요.

모든 상황에 대비한 리스크 방지라는 관점에서
규제 개념을 정립하다 보면,
문득 '불신의 위력'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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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佛心) 말고 불신(不信)...

모든 것 -특히 사람- 을 믿지 않고
오로지 제도화된 시스템만을 신뢰하는 것이
리스크 방지의 핵심이라고 봤을 때
금융규제의 툴(tool)과 민주주의 발전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믿었던 금융기관의 불완전판매로 인한 손실은
완전히 보상받기 어렵거나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믿었던 정치인의 무능과 부패로 인한 피해 또한
완전히 보상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후퇴한 민주주의를 복원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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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한 번 잘못해서 온 국민이 고생한 이야기...다들 잘 아시죠?

법과 제도를 포괄한 모든 규제 시스템은
결국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효율성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노엄 촘스키가 그랬던가요.
효율성만을 강조할 경우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독재정'이 될 테지요.

유사 이래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철인에 의한 정치'와 '성군으로서의 왕'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그 정체(政體)의 한계는
'한 인간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에서 드러납니다.

믿었던 인간이 배신할 때의 속수무책,
그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는 고스란이 국민들 몫으로 돌아오니까요.
결국 민주주의는 효율성과 편리성을 일정 부분 양보하는 대신,
인간이 아닌 시스템을 믿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금융규제와 민주주의 간의 연결고리가
다소 억지스럽다 하더라도,
불신의 위력이 공정성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합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격언과 사자성어와 유명인의 코멘트들이 있는지요.

하지만 우리가 선대보다
조금은 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고,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조금은 더 자유로울 수 있고,
불합리한 외압으로부터
조금은 더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불신의 위력'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닌,
제도화된 시스템과 명문화된 법규만을 믿겠다는 국민적 합의.
이 과정을 통해 성문 헌법이 탄생하게 됐으니까요.

최고권력자라도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
내 손에 쥐어진 칼자루조차 함부로 휘두를 수 없어야 하는 세상.
이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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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년 왕을 상대로 얻어낸 최초의 성문 규약집, 대헌장(Magna Carta).

인간에 대한 신뢰 대신 원칙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인간의 역사.
앞으로도 흥미롭게 공부해 볼 주제가 아닌가 싶군요.

"신뢰는 어디서나 독재의 어버이이며,
자유로운 정부는 신뢰가 아닌 경계심에 기초하고 있다."
- 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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