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르 파울 뤼번스, <유피테르의 번개를 만드는 불카누스>. 이미지 출처)
어떤 것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도 제대로 보고 있지 않고 어디에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의미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분노가 곧 제대로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니며, 분노를 넘어서는 이해의 전망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별에 이끌리는 한 분노란 자연스럽다는 의미다. 분노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분노의 자연스러움, 그 입체성을 제멋대로 탈자연화하고 평면적으로 굳힌 결과다.
분노에 대한 안이한 미화에 조심하자. 현대는 모순되는 쾌가 공존하는 시대다. 즉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지나치지 않게 적당히 해야 하는 시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상방뇨의 쾌를 미화하는 시대다. 아마도 이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몇몇 현대적 바보들은 분노를 참거나 적절히 변형하지 않고 시원하게 지르는 것을 찬미하고 있다. 야만으로 돌아갈 것을 찬양하는 문명적 세련성이 넘쳐난다. 분노에 대한 개념적·관념적 도취는 기묘한 문명 현상이다.
분노가 아무리 풍요로울 때조차 그것은 건강을 뒤집어놓는다. 분노를 긍정한다는 것은 건강과 행복 이상의 것이 삶에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건강과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지켜내야 할 것이 삶에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건강과 행복이 삶의 궁극적 의미이자 전부인 사람이 분노를 긍정한다는 것은 그냥 바보다. 그는 분노가 아니라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빨리 잊어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풍도를 따라가면 바람처럼 물처럼 가늘고 길게 살 수 있다. 아니면 철저한 이성적 관조법을 배우던가. 그런데 이 관조가 현대적 즐거움의 길과 과연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 길은 너무나 차갑고도 광적으로 뜨거워서 현대적 미지근함과는 결코 통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마음껏 화를 내고 나면 건강해진 것처럼 느껴질까? 합리적인 목적 달성과 무관하게 말이다. 첫째로, 그가 부수고 싶은 대로 부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혹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받아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잠깐의 권력을 즐긴 것이다. 즉 분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은 조건에 놓여 있는 것이다. 혹은 터무니없는 바보짓을 하고 나면 사람은 철저히 이성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이 되는 것은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이성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껏 화를 낸 덕분이라고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내가 손해를 입어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야 하고 똑같이 상처를 입혀야 한다」를 당위이자 계율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자아는 그 당위와 계율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공공연한 분노는 그의 자아 수복 행위가 된다. 설령 실제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만약 그의 계율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함과 품위와 정도를 잃어서는 안 된다」였다면, 흉하게 터뜨려버린 분노는 자신의 배를 가르게 하는 수치였을 것이다. 현대란 어떤 시대던가? 자의식 과잉의 고슴도치 시대, 손해에 가장 예민한(크지는 않은, 그래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시대다. 우아함과 품위와 정도라는 단어만큼 현대에 낯설고 우스운 단어가 또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선비 혹은 호구라 부른다. 자아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등가물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그 답으로 상처에 상응하는 분노의 표출과 파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야만 할까?
분노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 그것은 일찍 태어난 걸까, 늦게 태어난 걸까? 그는 분노로부터 얻는 동시에 그로 인해 죽을 것이다. 자신이 발견하고 간직한 라듐으로 인해 죽는 것이다. 모든 풍요는 곧 저주다. 화상에 쓰러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추고 더 오래 걸어가기 위해, 그는 격렬한 분노가인 이상으로 건강과 휴식과 재생의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이성적이고 온유하며 쾌활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반대되는 것들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에트나와 시칠리아가 공존하는 것처럼. 어둠과 별이 공존하는 것처럼. 적당히와 노상방뇨가 공존하는 것처럼.
분노를 긍정한다는 것은 지금 누리고 있는 쾌적한 도시 이상의 풍요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 긍정만이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미를 사유하지 않는 분노, 이성적이지 않은 분노에는 가치가 없다. 폼페이인이여, 분노에 굳지 않도록 주의하라! 좋은 분노를 가려내려면 그가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앞에서 보았듯, 분노의 폭발력 자체에 대한 관념적 도취는 널리 퍼진 문명병이다. 짜릿한 폭발과 함께 이성도 사유도 함께 터져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