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베일을 쓴 여인>. 이미지 출처.)
물론 철학자 역시 더 멀리 나아가려면 현실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예술가 역시 더 높이 날아가려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추상화하고 감쌀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성향의 차이는 결코 메울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사랑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곤 해도.
철학자들은 말이 많다. 그들이 예술을 할 수 없는 이유다. 철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 논증, 메시지, 개념이다. 이미지, 묘사, 형태는 그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소설에 짜증을 내기도 한다. 빙빙 돌려대지 말고, 그만 좀 떠들어대고, 나뭇잎의 색깔이나 행인의 얼굴이나 가구의 배치 같은 것 좀 그만 지껄이고, 그래서 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그런데 이 쓸데없는 것들이야말로 예술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예컨대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다. 문제 그 자체, 문제가 드러나는 구체적 양상들 그 자체다.
철학이 말이라면 예술은 보여주는 것이다.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타당하리라. 예술이 아무리 많은 말을 할 때조차 그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드러내는 것이다. 말하려고 예술을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모험가와 모험 소설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행동과 묘사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행해진다. 이 시대에는 기묘하게도 예술과 자신의 메시지, 자신의 행위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 이는 말의 예술, 쉬운 말의 예술인 소설 탓이리라. 돈 키호테가 말을 타고 풍차에 뛰어드는 대신 펜을 잡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펜이 아닌 창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자기 목소리를 낼수록 예술은 싸구려가 된다. 사람들이 들은 적 없는 것을 듣게 해주는 것이 아닌, 상투적인 말에 자극적인 향신료를 치는 것이다. 세계를 새로 낳는 대신, 기존(나)의 세계를 극히 빈약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예술은 카오스 속에서 형태라는 기적을 낳는다. 자연과는 다른 세계를 무한히 낳는다. ― 낙원에는 낳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기술과 달리, 형태의 가능성을 끝없이 실험하고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렇게 태어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술의 몫이 아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와 동침할 수 없다. 낳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른 영역에 속한다. 예술가는 완전한 형태를, 새로운 형태를, 상상하지도 못했던 형태를, 자기조차 알지 못했던 형태를 그저 잘 낳으면 된다. 그 과정은 앎을 요구하지만 앎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둘은 어느 정도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모든 어머니는 맹목적인 것이다. 오늘날에 형태라는 기적, 형태의 기쁨은 얼마나 과소평가되고 있던가?
예술가가 주장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 답 없는 세계의 권리다. 그럼에도 경악스럽게 존재하고 끊임없이 태어나는 형태의 권리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의 주장조차도 넘어선다.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불온한 주장이 아니라 말 없이 담담한 풍경이다. 존재란 올바르지 못하니까.
형태에는 의미란 없다. 그것은 의미를 두른다. 분명 그것도 말과 함께 의미 속에 있다. 그러나 말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드러낸다. 아름다운 여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하지 않음으로써) 수천의 의미를 두르기도 한다. 형태는 그 자체로 충만하다. 개념은 형태 위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난파하고 부서지며 새로 촉발된다. 개념에는 형태와는 다른 근본적인 결여가 있다. 형태는 그 결여를 드러내는 수면이 된다. 그것이 개념의 유희의 조건이다. ― 형태의 충만의 조건이기도 하다.
낳는 자와 말하는 자 사이의 불화는 필연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는 자의 오해 탓은 아니다. 여기서도 예술가는 침묵해야 한다. 낳은 자로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