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의 1%를 향한 분노!!! 그 정당성은 어디까지일까요 ?

chipochipo(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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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chipochipo@chipochipo 입니다.
그놈의 경제적 양극화는 온국민의 민감한 이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국에 있을때 시위대의 구호에 서명을 한일이 있었죠.

Is your income under 1.4 million a year ???
If that is true, You are the 99% !!!

당신의 연수입이 1.4백만달러 (한국돈 15억) 이하라면 당신은 99% 입니다.
결국 서명을 해줬고 그들의 시위를 쭉 지켜봤죠.

자본주의의 양극화가 도가 지나치니 극단적 사회주의적인
생각을 하는사람들이 늘어나는것 같습니다.

1% 2.jpeg

저도 소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때는 1%에 대한 안좋은 생각을 많이 가졌죠.
하지만 생각을 더 깊게 해보면
마냥 그럴수만도 없을꺼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네요.

어쩌면 진정한 자유라는것은...
평등이라는 가치와 양립할수 없을꺼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은 각 개인이 타인과 다를 자유가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곧 격차의 자유가 있음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이념에 빗대어 쉽게 이야기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의 격차란 필연적으로 발생할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겠죠.

capi.jpg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독재, 왕정이든간에
인간이 어떤 체제에서 살든간에 우리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쌀/빵/소고기/돼지고기/짬뽕/자장면/치약/칫솔/비누/반도체/석유/디스플레이/철강/등등
기타 여러가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이 문명을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우선, 인간들을 자유롭게 그냥 가만히 놔둔다고 칩시다.
그러면 인간들은 스스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생산활동을 하기 마련이고
각자의 성별/재능/관심사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할분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은 입시반 학원을 차릴 것이고,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호텔에서 요리를 할 것이고,
글을 잘쓰는 사람들은 스티밋 활동을 합니다.

이러한 무수한 분업활동 중의 한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이 지구상엔 탕수육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에겐 탕수육을 생산하는 자유가 있는 동시에,
탕수육을 선택할 자유 또한 존재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선택의 자유가 있으므로 더 맛있는 탕수육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중국집에 탕수육을 시킬때, 탕수육을 맛있게 튀기는 중국집에 전화하지,
[모든 중국집은 평등해야 한다]라면서 일부러 맛없는 중국집에 전화를 하지는 않을겁니다.

  1. 이 지구상에 탕수육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최소 둘 이상 존재하며,
    = 생산의 자유
  2. 사람들은 주어진 기회비용을 가지고 더 맛있는 탕수육을 선택하려합니다.
    = 선택의 자유

그래서 탕수육을 생산하는 사람들간에
더 맛있는 탕수육을 생산하려는 경쟁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탕수육을 만들어서 타인과 재화와 서비스를 서로 교환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더 맛있는 탕수육을 생산하는 중국집이
더 많은 주문을 받게 되고, 자신의 탕수육을 통해
타인이 들고 있는 재화와 서비스를 더 많이 교환하게 됩니다.

제가 방금 말한 일련의 과정들은 그 어떤 인위적인 개입이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산활동과 선택은 서로간의 경쟁과 격차를 자연스럽게 낳게 됩니다.
이것은 전혀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그 어떤 체제든지 인간에게 자유가 존재하는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인간들을 자유롭게 가만히 놔두면,
그 가운데서 특별히 더 뛰어난 생산활동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길 마련이고,
그 가운데서 특별히 더 많은 선택을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길 마련입니다.

(1) 스티밋 활동을 하시는 분들중에서
보팅금액 세지라수를 찍는 분들이 생기고
(2) 수학 강의라는 생산활동을 하는 강사들 중에
수강자 100만명 찍는 스타강사가 있으며,
(3) 축구라는 생산활동을 하는 선수들 중에
시즌 60경기 동안 70골을 찍는 선수가 있으며,
(4) 기업이라는 생산활동을 하는 사장들 중에 1조 매출을 찍는 사장이 있으며,
(5) 영화라는 생산활동을 하는 감독들 중에 관객수 1억을 찍는 감독이 있습니다.

최민정 선수가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서 4관왕을 하고,
마이클 펠프스가 수영 8관왕을 하고,
메이웨더가 50전 50승을 하고, 파퀴아오가 8체급 석권을 하는 것은
어떠한 기득권의 음모때문이 아니며, 누군가의 강요때문이 아니며,
자본주의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며,
그들 스스로의 자유로운 생산활동과 관중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뜻은
개인이 무엇을 생산할지에 대한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개인이 선호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각 경제주체의 격차와 불평등을 초래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을 없애고자, 이 세상을 강제로 바꾸어서라도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만들어야되겠다는 따듯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 사회 건국]이라는 따뜻한 생각은
도리어 이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선, 각 개개인의 격차를 없애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각 개개인의 격차를 없앤다는 의미는
각 개개인의 생산활동의 격차를 인위적으로 조절해야 하거나
각 개개인의 생산활동의 결과물들을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인위적인 힘으로 배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각 개개인의 경제활동을 일일이 통제하고, 지시해야 하는
초월적/초법적인 힘을 가진 중앙권력이 존재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가만히 놔두면, 생산활동의 성과와 자유로운 선택에 따르는 격차와 불평등이 생기길 마련인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다보니
필연적으로 개인에 대한 탄압과 억압이 생기게 됩니다.

고통을 제거하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타인들의 행복을 보살펴 줄 권리는 어디까지나
그들과 가까운 친구와 가족에게 한정된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같이 하라]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사회가 고통이 없고, 싸움이 없고, 경쟁이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부자도 없고,
1등이 없고, 꼴지가 없고,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마치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발상은
아주 위험스러운 발상일수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세상을 인위적으로 평등한 유토피아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를 낳게 됩니다.
그런식의 실험이 어떤결과를 낳았는지는 지나온 인류역사가 증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heil.jpg

쓰다보니 약간 빈부격차가 당연하다는 듯이 기울어진것 같은데요.
그래도 어마어마한 빈부격차는 반드시 해결을 해야된다는데
전 동의합니다.
다음번엔 그 자세한 방안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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