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pen]지극히 과거로 회귀하는 밤."스팀잇과 과거"

cagecorn(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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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림 그리던 파일이 날라갔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고 멍청한 실수 때문이었는데, 내가 뭐 그렇지. 케이지콘이 어디가겠는가.
나는 매사에 항상 이렇다. 이런 아주 사소한 실수로 인해 원본 파일을 잃어버린 게 한 두번이 아니다. 파일을 제대로 정리 정돈도 못하고, 저장을 자주 하지만 백업하는 걸 귀찮아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작업중이던 이번주의 웹툰 작업을 일부 소실한 건 괜찮았다. 사실 이 부분이 더 컸다면 아마 지금쯤 스팀잇 자체에 접속을 못 했으리라. 그러나 가슴 아픈 일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쪼야님이 여신 글작가X그림작가 콜라보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3일간 짬짬히 작업중이던 그림이 날아갔다.

그림이 날아갔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자 바로 구글해서 복구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돌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무참히 가로줄로 깨져버린 모자이크처럼 뭉개진 흔적만......원본은 아니더라도 JPG만이라도 남아있길 바랐건만...(나는 왠만한 그림을 전부 레이어 하나로 작업하기 때문에 JPG만 건재해도 세이프다.)
슬프다고 해야할까 허망하다고 해야할까. 그치만 한편으론 좋아하는 분께 드릴 그림으로서는 솔직히 썩 마음에 드는 그림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잘 된거 아닐까, 하며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이벤트 기간에는 못 맞출 거 같으니 그걸 통보(?)하는 겸 깨진 멘탈을 위로받기 위해(이게 주 목적) 스팀잇에 바로 고자질을 했다.
"여러분-! 멍청한 케이지콘이 한 이 멍청한 실수 좀 보십시오-!" 많은 분들이 위로해주셨다. 그 중에 그림의 모델이신 스프링필드님의 자상한 위로도 받았다. 죄송한 마음이 든다. 이벤트가 끝난다 해도 이번 주제로 한 그림은 꼭 완성해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요동친다.

스프링필드님의 글을 읽다보면 항상 '스팀잇과 과거'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이 스팀잇에서 주로 글을 잘 쓰시고, 많이 쓰시는 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흔쾌히 꺼내어 놓는 사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꽁꽁 숨기고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향만으로 글을 쓰는 사람.

나는 전자에 속하기 때문인지 후자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또 그런 글들이 더 재밌다. 어떤 방식이 더 옳냐 그르냐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또한 한 쪽에 속한 사람은 다른 편으로 절대 넘어가선 안 돼! 하자는 것도 아니다.

현실 속 문학 작품에서도 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이야기하는 화자가 무척이나 작가 자신을 닮은 부류. 이야기의 화자가 전혀 작가를 닮지 않고 시나리오 중심으로 흘러가는 부류. 이 또한 역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경계를 넘어선 안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난 개인적으로 전자보다 후자의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자기 자신을 닮은 화자를 내세우는 작가는, 자연스레 그 이야기가 작가의 자전적인 성격으로 흐르게 되어있다.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이 세상 모든 이야기, 등장인물은 다 쓰는 이를 닮을 수 밖에 없다. 그림그리는 사람은 그 작품이 은연중에 그리는 이의 생김새를 닮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작가의 가치관이나 사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 시나리오 중심의 글을 좋아한다. 너무 작가 자전적인 책은 십중팔구 그 작가가 평소 추구하는 가치관과 사상이 묻어나고, 시나리오로 풀 경우 은근하게 그것을 제시, 권유하는 반면 이쪽은 '자! 이렇게 하라고! 이렇게 해야만 옳은 거란 말야!' 라고 강제로 주입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까뮈라던가 헤밍웨이, 파묵, 레싱의 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 그들의 글은 매우 자전적이며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그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냥 내가 문학에 대해선 '솟'도 모르게 때문에 '우왕~ 노벨상 받았대!'라며 그 후광에 속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고 그렇기에 내가 앞에서 언급한 대작가들 역시 인생에 흠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영겁의 시간에 걸쳐 고민하고 고찰하였기에 생각을 주입당해도 싫지 않다. 그런 이들의 사고를 닮을 수만 있다면 가치 주입이든 세뇌든 못 할 게 뭐 있나.

으앗차, 서문이 너무 길었고 전혀 다른 주제로 향했다. 이런 말은 킴밀님만 하실 줄 알았는데 나도 하게 되다니 킴밀님이 읽으시다 언짢아 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ㅋㅋㅋㅋㅋ)

다시 본론을 이어가보자면, 글을 쓰는 부류 중 전자, 즉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는 이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과거'를 끄집어낼 수 밖에 없다.

사람이 글을 쓰기 위해선 소재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그 소재에 살을 붙이기 위해서 머릿속에서 소재에 얽힌 마인드맵이 그려진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과거 기억들이 찰싹 찰싹 달라붙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기억에 의지해 소재에 얽힌 일화, 느낀점, 현재에 그것을 돌아보는 소감 등등을 적게 된다. 자연스럽게 기-승-전-결의 구도가 그려지는 것도 모자라, 대부분 비슷한 유년기를 보냈다보니 과거 기억으로 포문을 여는 것은 독자의 흥미 및 이입을 유연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 글쓰기의 효자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추억팔이'인 것이다.

'추억팔이'라고 쓰니 좀 상스럽다. 다시 진중하게 자기 자신을 내비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블록체인이라는 특성 앞에서 한 번 보여준 자신의 과거는 먼 후대에까지 박제된다. 이미 통판된 책에 쓰여진 내용을 다시 수정하려는 것과도 같다. 후에 이것이 틀린 말이라고 첨언할 순 있어도, 구 버젼을 구입한 이들에겐 여전히 틀린 내용이 남아있다. 모든 흠, 가리고 싶은 부분들이 영원히 박제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 집에 있는 '파리대왕'책은 너무 옛날에 번역된 책이라,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란 아이들이 인생 첫 원주민들을 보며 하는 말이

"오랑캐다-! 오랑캐가 나타났다-!"

...와 같이 오번역된 것이 책엔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처럼 말이다.

또한 익명성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SNS에선 더욱이 그렇다. 개인 정보가 하나하나 밝혀지다보면 내가 어디 사는지, 무얼 하며 사는지, 언제 어느때 주로 활동하는지 영역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쉽게 발각되는 것이다.

그런 리스크를 모두 안고도 여전히 과거 이야기로 글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그만큼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상 100% 상상력에 의존해 글을 쓸 수 있는 천재가 아니라면 누가 기억에 의존하지 않겠는가. '상상력'이란 것도 사실상 자신의 두뇌에 남아있는 모든 정보들, 기억부터 시작해 잠재 의식 저 밑바닥에 가라앉은 신화, 전설, 원초아까지 총동원 된 잡탕에 불과하다. 창작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라지만 기억과 데이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이제 날고 긴다는 인공지능도 역시 그동안의 인류가 쌓아놓은 방대한 데이터를 총동원하여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바둑을 둔다. 물론 이 경우는 역사 속 대가들에게 배움을 이어받은 후세 인간들도 마찬가지이고.

나 같이 스스로가 노출되는 것에 둔감한 사람들은 그래서 스팀잇에 글을 쓰는 것에 별다른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트러블이 발생할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 글을 써야 보팅을 받고 자신을 알리고 남들과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다보면 자기 자신이 새어나갈 수 밖에 없다. 필연적이다. 이때 나 자신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으려 하면 할수록, 글 쓰는 것도 어려워진다. 순전히 정보성 글이라면 괜찮을지도. 아니면 특정 주제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라면 괜찮을 수도. 그러나 '에세이'성격을 띈다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된다.

이 에세이라는 것의 특징은 또, 과거를 노출하는 글의 특징은 이거다. '전염성'이 있다. 내가 과거 무언가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면 당연히 그것에 동감하는 이들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의 경우에 그 소재를 대입하게 되고 자연스레 또다른 창작으로 이어진다. 내가 피운 불꽃이 자연스레 남들에게도 옮겨지는 것이다. 이건 실로 멋진 광경임과 동시에 SNS의 순기능이다. 새벽 3~4시에 자신이 쓴 글이 남들에게 동요를 일으키고 그들이 자신의 언어로 다시 재창조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모두 잠든 시간 옥상 아지트에 둥기둥기 모여, 밤하늘에 폭죽 놀이를 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물리적 거리와 시간을 뛰어넘어 그 사람과 소통을 한 듯한 환상도 든다.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쪼가리일 뿐인데, 그걸 통해 상호교류가 일어난다. 감정이 옮겨진다. 과거가 전염된다.

여기까진 사실 누구라도 스팀잇을 하다보면 느낀 주제일 것이고 소재로 이미 썼을 법하다. 내가 여기서부터 준비한 반전은 이것이다. 나는 소위 '과거를 내비치며 글을 쓰는 부류'이지만 재미있게도 난,

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얼마 없다.

마치 내가 어제 날려먹은 이 그림을 보듯이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순히 그리던 작품을 홀라당 태워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별다른 고찰을 못했는데, 오늘 다시 이 허망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하나 연상되는 게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건 꼭 내 기억을 보는 것 같은데....'

그렇다. 내 기억은 이렇게 단편적인 부분들만 얼키설키 남아 있고 그외의 80%는 깜깜한 암흑이다. 기억상실증이냐고? 아니다. 아마도 사고에 의한 트라우마가 맞을 듯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라우마에 의해 기억을 스스로 지워낸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른바 '부정'이다.

나는 내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부정했고 혹은 되감기를 하지 않아 기억이 많이 소실되었다. 이 소실되었다의 개념이 모호한데, 가령 예를 들자면 내가 길을 걷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면, 분명히 이유 모를 분노와 두려움,공포와 살의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분명 나는 그 얼굴을 알지만 왜 아는지 기억을 못한다. 하지만 화학적 반응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른 도망치거나 길을 벗어난다. 이 정도의 힌트라면 비슷한 체험을 가진 이들은 이미 '!' 하고 있을 듯 하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학창시절 기억이 없다. 초~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깡끄리 날아갔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저 내가 홀로 앉아서 그림...그림...그림을 그리던 기억 뿐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반복적인 활동이라서 당연히 매 순간이 기억나진 않는다. 창백한 그림들만이 종이에 남아 기록되어있을 뿐. 그것들이 내가 나이가 들고 그때 시절에 살아있더라는 증거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나이테를 남겼다.

그래서 이 부분이 되게 역설적인데, 나는 과거를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대부분의 과거 기억이 없다. 대략적으로 내가 무슨 일을 당했고 어떤 시절을 살았는지는 알지만 그것이 세세하고 하나 하나가 기억나진 않는다. '아~ 그땐 그랬지.'하게 되는 거다. 오랜만에 동창들의 모임에 나가면, 나는 그들의 이야기 어디 하나에도 공감을 못 한다.
"야 너 XX알지?" "아니?" "엥? 너랑 분명히 같은 반이었는데?" "기억 안 나." 그러다가 그 친구가 사진을 보여주면 "아....아~~!! 알 것 같아, 아는 얼굴이다!"하고 만다. 얼굴은 분명히 기억나는데, 정확히 왜 기억이 나는지 모른다. 인간의 두뇌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기억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은 깡끄리 땅밑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부정하는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나거나 하진 않냐고? 당연히 그러하다. 어렴풋이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러나 깨고 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잊어버리게 된다. 분명 내 잠재의식 어딘가엔 묻혀있지만, 그것이 딱히 내 지금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그 기억들도 그냥 그대로인 편이 낫다.

결론까지 너무 길었다. 사실 여기까지 정독을 해서 보시는 분이 얼마나 될까 걱정스럽다ㅋㅋ;;
그러니까 결국 나는 과거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정말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는 기억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를 먹을 수록 현재진행형이라서, 오히려 이젠 상처가 거의 아문 성인이 되어서야 텅 비어버린 내 유년시절이 조금 안타깝기는 하다. 친구가 내게 묻곤 한다. '우리 수학 여행 간 기억 안나?' '거기서 놀이기구도 타고 그랬잖아.'
'아니? 기억 안나.'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수학 여행의 즐거움도, 놀이 기구의 기쁨도 모른다. 아무리 힘든 시절이었다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짝 반짝 빛나는 순간들, 소중한 감정들이 있을텐데 그것까지 함께 묻혀버린 것이다. 항생제를 때려부으면 좋은 균 나쁜 균 상관없이 다 죽여버리는 이치처럼.

그래서 오히려 이제 나는 더 집착적으로 이 소위 '영원히 박제되는 곳'에 내 옛날 이야기를 적으려하는지 모른다.
이것들마저 언젠가 잊어버릴까봐, 지워져버릴까봐 영원히 여기에 남겨두려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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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복구시킨 이 그림의 저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이곳에 영원히 남길 바라는 마음처럼.


뭐라고 마무리를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어제 날려버린 그림이 아까워 그걸 주제로 억지 글을 쓰는 것에 불과하다 ㅋㅋㅋ 이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쓸지 말지 그것은 순전히 쓰는 이의 마음이다. 어떠한 강제도 없고 어떠한 규율도 없다. 하지만 이 스팀잇이 확실히 타 SNS에 비해서 '과거지향적'인 것은 사실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을 감추며 글을 쓰시는 분들은, 남들보다 두 배는 더 힘들 것이기에 항상 응원한다는 말만 드리고 싶다.

추가적으로 내가 가장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인, 스프링필드님의 포스팅에 쓴 나 자신의 댓글을 첨부해본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사실 이 스샷만 보셔도 충분하다는 것이 함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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