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말들
은유
유유
카테고리 인문
ISBN 9791185221847
목차
프롤로그
글쓰기는 나쁜 언어를 좋은 언어로 바꿀 가능성을 대변한다.
행동하는 자만이 배우기 마련이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간절하게 원하면 지금 움직이세요.
새 비료를 뿌리기보다는 매일 조금씩 땅을 다져라.
미루겠다는 것은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다.
아주 서서히 글을 쓰는 목소리를 찾아냈다. 지적이고 공정하며 이성적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것이었다.
매일 작업하지 않고 피아노나 노래를 배울 수 있습니까. 어쩌다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 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프루스트는 다른 작가들이 통상 스쳐 지나가는 것을 분할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한정 분할할 수 있는 감각을 주었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나는 씁니다.
싫증 나는 문장보다 배고픈 문장을 써라.
닫힌 방 안에서는 생각조차 닫힌 것이 된다.
내 안에 파고들지 않는 정보는 앎이 아니며 낡은 나를 넘어뜨리고 다른 나, 타자로서의 나로 변화시키지 않는 만남은 체험이 아니다.
적절한 장소에 찍힌 마침표만큼 심장을 강하게 꿰뚫는 무기는 없다.
영 아닌 소재는 없소. 내용만 진실 되다면, 문장이 간결하고 꾸밈없다면.
진실 되지 못한 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현란한 수사로 치장을 하게 되면, 그것은 고운 헝겊을 누덕누덕 기워 만든 보자기로 오물을 싸 놓은 것처럼 흉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글쓰기에는 어떤 것도 운 좋게 찾아오지 않는다. 글쓰기는 어떠한 속임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 모든 문장은 기나긴 수련의 결과이다.
글에서 첫마디가 길흉을 좌우하는 수가 많다. 너무 덤비지 말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말 것이다. 기奇히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면 된다.
난 존재들과 사물들을 대변하는 배우자이자,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것들의 증인이기도 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
‘쓰다’라는 동사는 작가들이 따라야 할 궁극적인 도道이다.
우리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느냐이다.
필일오必日五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는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거나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라고 권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받는 영향이라는 것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받는 거지, 바른 이해나 영향 자체의 좋고 나쁘고 한 것은 별 관계가 없는 일이다.
시간은 수학적 단위가 아니라 감수성의 의미론적 분할이다.
나는 언어가 살아 있는 한 언젠가 자기 모습을 드러낼 모든 독자들을 위해 쓴다.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둔필승총鈍筆勝聰
삶에서, 의미란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관계를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자기 자신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자기만의 운동으로 삼으라.
문체란,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다.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벌거벗은 자신을 쓰라. 추방된 상태의, 피투성이인.
한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이해한다. 만물에는 똑같은 법칙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실천은 기본적으로 ‘망설임들’로 꾸며집니다.
그림이란 실제적 장소를 그대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그곳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제공하는 윤곽과 인상을 조합해 내는 것이다.
요령은 순전히 단어의 배열에 있다.
어떻게 쓰는지 배우려거든 신문, 잡지 쪽 글을 많이 써 봐야 해. 머리를 유연하게 하고 언어를 지배하는 힘을 길러 주거든.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기 글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과 달라지려 하고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세계를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다.
나는 ‘영혼에 대한 이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모은다.
나쁜 글이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가 없는 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자기 생각은 없고 남의 생각이나 행동을 흉내 낸 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 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지게 썼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글이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너와 세계의 싸움에서 세계를 밀어 줘라.
숙련성이란 관리된 빈곤화다.
창작이 곧 삶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때로는 창작이 삶을 되찾는 방법이다.
본다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무언가를 드러낼 때에만 신뢰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고 그 처지가 되어 보는 것, 그것이 작가의 일이다.
‘나 아닌 것’을 끊임 없이 자기 안에 투입해 나가는 운동성이야말로 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상투성은 문장에서 발휘되면 민망하지만 주제가 되면 핵심 요소로 변화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나 아닌 것의 실험장으로 만드는 일이다.
간결함이란 말해야 할 것을 적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꽉 막히는 건 때때로 내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는 걸 뜻한다.
글쓰기가 단번에 완성되는 생산품이 아니라 점점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글을 잘 쓸 수 없다.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
문학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가 손에 넣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우선 다른 사람에게 증여함으로써만 손에 넣을 수 있다.
논픽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겪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고 다형적이고 덧없는 경험을 탐구하는 글입니다.
사람을 웃기고 울려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기다리게 해라.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언어는 시인과 노동자의 합작품이 되어야 한다.
너의 마음에 드는 장소는 …… 정열적으로 묘사하면 안 되고 간결하고 명확하게 묘사해야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바로 삶의 현장이고 삶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글쓰기는 시작되어야 한다.
글 쓰는 것이 너무도 힘들 때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쓴 책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글쓰기가 항상 힘들었으며, 종종 거의 불가능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곤 합니다.
글쓰기의 거짓 욕망이 다른 욕망, 주체 자신도 모르는 욕망을 가리는 것입니다.
소설을 쓸 때마다 내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보다는 ‘지금 나는 부엌에서 튀김을 올리고 있다’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시험 삼아 내 입으로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정말로 진지한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이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벌어진다.
나는 씁니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안심합니다.
퇴고는 자신의 글로부터 유체 이탈하여 자신의 글에 대한 최초의 독자가 되어 보는 경험이다.
접속사를 꼭 넣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게. 없어도 사람들은 전체 흐름으로 이해하네.
자기 글을 보여 주고 싶은 점증하는 욕망은 결국 완성을 위한 모터가 될 것이다.
에세이의 결정적 기술은 글쓴이가 자기 노출을 절묘하게 통제하는 데 있다.
자아를 허락한다는 것은 온기, 근심, 연민, 아첨, 불완전함의 공유 등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이 빠지면 무미건조하고 사실성 없는 글이 된다.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다.
Man(인류)에 대해 쓰지 말고 man(한 인간)에 대해 쓰라.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 주는 누설자다.
글쓰기는 냇물에 징검돌을 놓는 것과 같다. 돌이 너무 촘촘히 놓이면 건너는 재미가 없고, 너무 멀게 놓이면 건널 수가 없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무관심과 냉소는 지성의 표시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이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칼럼은 편견이다.
말이 몸에서 흘러나오고, 그 말들을 종이에 새겨 넣는 과정을 느끼는 것이다. 글쓰기는 촉각적인 면을 갖고 있다. 육체적인 경험이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다.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데 적합한 말은 하나밖에 없다.
자연은 말을 하고 경험은 통역을 한다.
작가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주 건강해야 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닐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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