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지가 너무 오래되었지만 학교에서는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요것도 하지 마라 등 부정형의 수많은 교칙과 당부를 가장한 명령들이 많았고 반대의 경우로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생님과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라 정도가 다였던 기억이 난다. 즉, 금지, 명령, 규칙, 통제 등의 강압적이고 다소 옭아 메는 수동형의 사회분위기를 대신하여 이제는 가능, 솔선수범, 동기부여 등의 자발적이고 미래를 보며 큰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능동적인 단어들로 사회가 채워지고 있다.
이 두 사회는 공통점이 있는데, 앞선 전자의 사회의 부정성은 범죄자, 반항아를 만드는 반면에 후자의 긍정성은 우울증과 루저라는 원하지 않는 부산물을 만들어 낸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매년 10월 정도가 되면 바빠지기 시작해서 연말까지 쭉 달려야 한다. 그 해에 달성해야 할 많은 주어진 성과를 채워야 할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미루어 왔던 그 많은 무거운 짐들의 무게를 현실적으로 실감하며 여러 방법으로 고군분투하게 된다. 분명 그 순간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을까? 도대체 작년에 난 뭘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하며 자기자신을 너무나도 몰랐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과대평가했던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며 원망해본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야전, 백병전, 산전수전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에 설상가상으로 연말까지는 내년 성과에 대한 계획을 내고 이를 최종 승인받야야 한다. 결국 지금 나는 내년 이맘쯤에 다가올 또 하나의 원망과 고통을 잉태하고 있는 격이다.
기업의 성과는 대부분 전산으로 1년 내내 관리되고 학교에서 저기 축구골대까지 돌아오는 선착순을 해봤듯이 헉헉대는 친구들 속에 순서가 냉정하게 점수화되어 떨어진다. 순간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뛰지 않아도 되는 “커트라인”에 들어갈 수 있을지 긍금해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얗게 태워버린다. 그 다음은 쓰담쓰담과 술 한잔이 기다린다.
혹시 우린 도축장에서 많은 무리 중에 오늘 내가 끌려나가지 않았음을 즐거워하는 한 마리의 가축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 뒤에 숨어있는 위협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지만 술 한잔의 따뜻함과 통장에 찍히는 숫자들에 묻어 버리는 건 아닌지
2006년 5월 6일, 한국 예능에서 역사로 남겨질 “무한도전”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출연진들은 불가능하고 황당해 보이는 많은 일들에 도전하며 이를 이루어 나가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많은 웃음을 던져준 최초의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이라 하겠다. 이 프로의 재미는 각 개인의 평가에 맡기고 단지 “무한도전”이라는 이 타이틀은 “넘치는 가능성의 사회”라는 맥락에서 하나의 좋은 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성과에 이리 열광하는지는 간단하다. 살아남기 위해서이고 이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못하는 걸 한다고 해야 하고 내게 주어진 일에 이미 버겁지만 또 “저 주세요” 라고 하는 무한도전을 하는 것일까?
역사에서 보듯이 인간은 “more, more and more”을 원한다. 가족 또는 부락 내에서의 생산에서 공장과 노동자가 나타나면서 서두에서 말한 금지, 통제, 규칙 등 부정성의 규율사회에서는 이 생산성의 극대화의 한계가 포착되었고 그 임계점이 드러났다. 즉, 고용자들은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다른 패러다임을 가져오는데 1차적으로 스스로 달리게 하는 “성과”라는 양날의 검을 가져오고, 2차적으로는 성과에 지친 나를 위로하고 끝없이 달리게 하는 “긍정성”이라는 만병통치약 또는 가면이 바로 그것이다.
즉, 노동을 제공하는 우리에겐 아무런 권리도 주권도 없으며, 그저 성과와 긍정성이라는 마약에 취해 자기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내가 원해서이므로 나는 자유롭다” 라는 생각에 이르는 경우까지 생긴다. 우리의 이런 불만과 협상이라는 주권을 위해 “노조”라는 단체에 위임했지만 이들 또한 바라보는 곳이 이젠 다르게 되어버렸다. 이들은 우리가 기본적인 생산성은 제공해야 함을 망각하기도 하고 40프로 이하의 생산성은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5년 전에 우연히 베스트셀러 칸에 있던 이 책은 평소 보라색을 좋아하던 개인적인 취향과 아주 얇았던 책의 두께, 이 두 가지 이유가 나를 이끌었다.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오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두 자학적 특징을 나타내고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피로사회”라는 이 책이 문제의 원인을 긍정성의 과잉으로 보는 만큼 자기 자신을 자기가 착취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에 대한 이해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는 자아 성찰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하지만 이는 이런 사회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느껴봤고 소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명언이 현실로도 가능하기도 했던, 서울대를 지방의 좋은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한, 두 명씩 많게는 4명까지도 보내던, 집과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올라가서 그나마 집 한 채는 가지고 있을 수 있던, 취업은 했지만 좀 작은 회사이고 받는 임금이 조금 작았던 최소 90년대 이전 출생자들에겐 이 감정의 이입이 가능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그 이후 출생자들에겐 벌써 잉여로 가득한 사회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하늘은 부자 또는 권력을 가진 부모가 있는 자를 돕는다, 서울대는 이미 부의 대물림과 함께 또 다른 형태의 대물림이 되어 가는, 개천에서는 용이 날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개인의 성찰이 해답이 될지는 장담하기 힘들어 고민스럽다.
“성과를 바란다면, 더하기가 아닌 빼기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큰 일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는 것은 집중력, 즉 이때다 싶을 때, 다른 것 전부를 물리치고 해야 할 일, 단 한 가지에 집중하는 스킬이 없기 때문이다." - 록 펠러 -
내용은 다소 진부하고 따분하여 수면장애가 있는 분들에겐 다른 목적으로 권장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