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아빠는 여름비, 라고 했다. 아빠는 '여름비가 온단다' 라고 말했다. 여름이란 말이 너무 낯설어서 비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맨손으로 나온 나는, 다시 9층까지 찬찬히 돌아가 우산을 쥐고, 저 높은 곳에 둔 코트를 기어이 끌어내려 입고 나온 아침을 생각한다. 봄비라면, 이것이 여름비라면, 지난 봄을 잘못 난 게 아닐까. 순간 스치던 생각이었다. 아마 너무 진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 그럴 리 없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걷는데 양말 바닥이 축축하다. 간밤에 침대 아래 벗어둔 마스크팩을 양말 째로 밟았지 뭐야. 그래도 소풍을 포기할 순 없지.
너무 예쁘네요, 라는 여섯 음절 덕분에 내 세계는 제자리를 찾아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처럼 팟 하고 불이 꺼진 세계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거짓말처럼 금세 환해진거다. 유일한 내 세계만이 나의 세계를 찾고 있는데, 찾아주는데 내가 무슨 수로 불을 끄겠어. 손가락만 조금 움직이면 켤 수 있는 스위치지만 단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어 놀랐던 밤이 있었다. "어굿, 너무 예쁜 아이디죠?" 놀랍도록 찬란한 세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