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력 없이 연차만 쌓은 사스마리였다. 나는 기자 7년 차에 사스마리가 됐다.
사스마리는 사건기자를 뜻하는 업계의 은어다. “경찰서(察)를 돈다(廻)”는 뜻의 일본어 사쓰마와리에어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은 사스마리를 줄여, 자조하듯 ‘사슴’이라고 우리끼리 말한다.
동물 사슴은 목이 길어 슬프지만, 기자 사슴은 일이 고돼 슬프다. 사스마리는 경찰서 기자실로 출근하며, 각종 사건·사고가 타지면 현장에 튀어간다. 대체로 각 사에서 연조가 어린 기자들을 배치해 기본기를 가르친다.
나는 수습기자 시절 잠깐 사건팀에 몸을 담갔을 뿐, 사스마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사 후 나는 편집부에 가서 한 2년쯤 일했다. 그리고 체육부로 갔다. 사스마리는 나의 컴플렉스였다.
사스마리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내 동기들은 일찌감치 사스마리를 졸업했다. 나는 나보다 적게는 1년, 많게는 4년 후배들과 일했다. 후배들의 사스마리 경력은 나보다 길었다.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되기는 싫었다.
나는 종로·성북·종암경찰서, 국가인권위원회, 고려대 등을 출입했다. 그외에 종로구, 성북구, 종암구 일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다 내 몫이었다. 조계사도 내 담당이었다.
사스마리 첫날 나는 곧바로 조계사로 갔다. 집시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수배당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종로서 기자실에 짐을 풀었겠지만, 그땐 그런 요령도 없었다.
나는 며칠간 조계사로 출근했고 조계사에서 퇴근했다. 12월이었다. 오라지게 추웠다. 나는 덜덜 떨면서 행여나 한 위원장이 창문을 열고 한마디 할까 싶어, 그가 머무는 조계사 관음전 3층 창문만 바라봤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낮에도 추웠지만, 밤에는 더 추웠다. 너무 추울 땐 야외에 향을 피워놓은 곳으로 갔다. 거기 촛불이 많았다. 불자가 아니라 거기를 뭐라고 부르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불 가까이라고, 몸에 온기가 돌았다.
경찰은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는 입장이었다. 한 위원장은 “노동법 개악을 중단하면 조계사 스님들과 함께 자진 출두하겠다”며 버텼다. 중간에서 조계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계사는 아사리판이었다. 며칠 그렇게 밀고 당기다가 경찰이 한 위원장을 끌어내겠다며 경력을 동원해 관음전을 에워쌌다. 경찰은 그러나 정치적 부담 때문에 한국 불교 조계종의 본산을 감히 밀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어디선가 무슨 단체 회원이라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관음전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했다. 경찰은 경력을 둘로 나눴다. 안쪽 경력이 관음전을 계속 압박했고, 바깥쪽 경력은 단체 회원들의 난입을 막았다.
욕지거리하는 사람들의 눈은 반쯤 뒤집혀 있었다. 그 벌어진 입에서 욕과 함께 침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무슨 악귀 같았다.
조계사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기자회견 했다. 자승 스님은 내일 오전까지 한 위원장 거취 문제를 해결할 테니 경찰은 물러가라고 말했다. 경찰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까 그 무슨 단체 회원 사람들도 시나브로 사라졌다.
조계사에서 한 블럭만 넘어가면 인사동이다. 밥을 먹으러 인사동 거리로 넘어갔다. 인사동은 평화로웠다. 노동자일 시민들은 한 위원장의 투쟁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 위원장은 노동법 개악을 막겠다면서 투쟁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노동자를 위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정작 노동자들이 외면했다. 아니 그것은 외면도 아니었다. 아예 알지 못했으니까.
민주노총의 고립은 일부 노동자만 대변하면서 강경 노선을 추구한 민주노총의 패착이었을까. 아니면 언론의 의도적인 빨간칠과 폄훼 때문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해가 떨어졌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 조계사 대웅전이 은은한 금빛으로 빛났다. 독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의 조계사는 극락정토였다. 낮에는 지옥이었는데. 지옥과 극락이 한데 있었다.
불자는 아니지만, 부처님 오신날 연등 구경하려고 어제 큰아들 손 잡고 집 앞 큰 절로 놀러 갔다. 네 살 아들은 연등을 가리키며 “비누방울”이라고 말했다. 문득 그때 조계사의 밤 풍경이 떠올라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