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로서 내가 본 촛불집회의 몇 장면을 기록으로 남긴다. 최대한 자료에 의존할 것이나, 기억이 뒤섞여 있을 수 있다. 탄핵 전이므로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쓴다.
2016년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새끼를 뿌리치고 또 광화문으로 나왔다.
오후 4시부터 ‘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박사모) 등 50여개 보수단체 연합체인 ‘대통령탄핵기각을위한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가 서울시청 및 덕수궁 대한문 일대에서 ‘누가누가 잘하나’ 집회를 했다. 찬바람이 구스다운을 뚫고 들어와 슬금슬금 뼈에 닿도록 추웠다.
태극기를 든 인파가 대한문부터 성공회서울성당까지 약 200m를 채웠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효” 등의 구호를 외쳤다. 77세 A씨는 “나라를 지켜야 한다. 촛불이 우리나라를 북한에 갖다 바치려 한다. 젊은 세대는 6·25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 모른다.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들어라”고 했다.
64세 B씨는 “좌파 정권이 집권하면 안 된다. 사드를 안 하면 트럼프가 미군을 철수시키고 적화통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60세 C씨는 “젊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그 사람이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젊은 친구들이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 잘 몰라서 저러는 것”이라고 했다.
정광용 박사모 회장은 무대에 올라 “준비한 태극기가 10만개가 넘는데 모두 동이 났다. 100만명 이상이 집회에 참가했다”며 “박사모 회원들을 동원해도 2~3만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100만명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 많기는 많았다. 젊은이들도 있었다.
경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프레스센터 앞 횡단보도에 차벽을 세우고 경력을 배치해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의 분리했다. 때때로 약간의 신경전, 말싸움 정도는 벌어졌으나 눈에 뜨이는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양측의 정치적 견해차로 인한 기타 불미스러운 사건·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촛불 쪽으로 이동했다. 내 정치 성향과 별개로, 태극기집회를 취재하면 기가 좀 빨린다. 전반적으로 연사들의 데시벨이 높고, 참가자 저변에 깔린 분노가 내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박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로 촛불집회는 절반쯤 축제 분위기여서 나도 덜 힘들었다.
9차 촛불은 박 대통령 하야와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의 동반 퇴진을 촉구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분위기가 더 고조됐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관계자들은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시민들에게 양초, 피켓 등을 나눠주었다. 시민들은 경찰 차벽에 성탄절 인사를 적은 현수막을 붙였다.
촛불 시민들은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하야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캐럴 ‘징글벨’의 중 ‘종이 울려서 장단 맞추니 흥겨워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르자’는 ‘촛불 이겨서 하야한다면 흥겨워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를래’로, ‘펠리스 나비다’(Feliz Navidad·메리 크리스마스)는 ‘근혜는 아니다’로 개사해서 불렀다.
연인, 부부 참가자들이 적잖았다. 30대 D씨는 “지난번에 조카와 왔는데 너무 추워서 애인과 왔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집회가 아니라 파티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남편과 나온 47세 E씨는 “성탄 전야라는 특별한 날을 맞아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다. 축제처럼 촛불을 즐기고 있다. 그래도 마음 한쪽이 무겁다. 웃픈 현실”이라고 했다.
본집회 전인 오후 4시 ‘물러나쇼’(SHOW)가 열렸다. 가수 마야와 이한철 등이 출연했다. 날씨가 추워서 행진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행진 후 오후 7시 30분부터 ‘하야크리스마스 콘서트’도 열렸다. 중간에 최순실씨와 꼭 닮은 시민이 무대에 올라 체조를 했다. 시민들도 웃고, 기자들도 웃었다.
각각 주최 측에 따르면 태극기집회에는 100만명, 촛불집회에는 55만명이 모였다. 태극기 쪽에 2배나 많은 시민이 모였다는 것인데 양쪽을 다 지켜본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치였다. 경찰은 촛불집회 참가자 인원이 3만 6000명, 태극기집회 참가자 수가 1만 5000명이라고 추산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크리스마스는 용서와 평화, 사랑의 날이어야 마땅하다. 피부색과 정치적 성향, 종교를 떠나 인류 대부분이 크리스마스를 축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야, 탄핵, 퇴진과 같은 단어는 크리스마스와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는 하야 크리스마스 따위의 성탄 인사를 주고받을 일이 없기를 나는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