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개 일기 chapter 3

admljy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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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치밀어 오른다만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 알 수 없다. 몇 달 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논리적 비약이 가득 담긴 과격한 것들을 써대며 나름의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2006년의 여름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그 사건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했다면 그 이후 연속적인 방황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작은 성공을 통해 과거에서 졸업했노라고 믿었고 그 경고의 메시지를 읽지 못했다.

군대는 내게 터닝 포인트였다. 나는 좋은 군대를 나왔다. 카투사들은 그 나이 대 최고의 엘리트 그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년 간 그들과 시간을 보내며 나를 시험해볼 기회가 있었다.

나를 바보 취급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실은 그들 중 대다수는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놈들이었다. 시시껍절한 자기 가치관을 강요하는 바보들은 어디에나 널려있고 그런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먼저 무너진다. 그 무식하고 성찰 없는 텃세에 일일히 반응할 이유는 없었다. 군대는 달랐다. 군 조직 내에는 나보다 우월한 지적 수준과 고매한 인격을 가진 이들이 널려있었다. 더군다나 학교나 교회에서 내가 나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것에 반해 군대 내에선 남김 없이 나 자신을 드러낼 시간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2년이 지날 무렵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밖에 취급되지 못했다.

장점을 드러낸 적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잠깐 반짝이는 별빛이 밤을 낮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내가 종종 보여준 좋은 성과는 내 무능함과 인격적 결함을 덮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나와 친했고 나를 진심으로 위해준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좀 별종에 특이할만큼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내 무능과 비효율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강한 나는 허상에 불과했다. 나는 여전히 약하고 피해의식에 가득찬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힘들게 쌓아올려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성은 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제대 후 나는 일전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몇 가지를 실험해보았다. 결과는 예상한 바 그대로였고 나는 자신이 너무도 평범하고 많은 경우 평범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자 마음 한 구석에 막연히 존재하던 확신이 사라지더라. 그 백일몽들이 전혀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만 근본적으로 나는 더 이상은 몰이성적으로 나를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죄악이다. 거듭된 실패와 비난에서 살아 남기 위해 나는 자신을 바꾸어야 했다.

이 세계는 나를 고문했음에도 그 상처를 가리려는 내 시도를 적나라하게 비웃었다. 이런 망신이라니.

나는 밥을 굶어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내가 이 모든 과정에서 종국적으로 도출한 결론을 이기적이라고 비웃는다면 어쩔 수 없다. 다만 여하튼 나는 지속적으로 약탈당하는 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선수방위에 나서고 싶다. 그것이 차후 어떤 방법론을 취할지 지금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도가(道家)의 '자신의 터럭 하나를 세상 모든 사람의 목숨과 동등히 여기는 개인주의' 정도가 되지 않을가 싶다. 싸이코패스까지 될 필요야 없겠지만.

거듭된 실패에도 감사함을 잃지 않고 사는 위인들도 있다만 그것을 나 같은 소인배에게 강요하는 것은 극히 부당하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 강제로 학습해야 했던 기독교적 도덕에 대한 강한 반발이 남아 있기에 더더욱.

나는 결국 타자와 소통하는 데 실패했다. 물론 내 인격을 겉으로라도 남과 조화시키는 것을 여태 못 배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알량한 자존심은 세상이 내게 권하는 위치를 수용하지 못하더라. 현실이니 늘 받아들였다만 웃으며 만족할 생각은 없다. 내가 더 불행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더욱 무관심해질 것인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보복할 것인가. 후자 쪽을 택하고 싶겠지만 객관적으로 나는 후자를 실행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일단은 더 무관심해지는 쪽을 택할 생각이다. 첫번째 장에서 말한 감정의 제거는 이와 같은 맥락이다. 어차피 뽑을 칼이 아니라면 쳐다보지 않는 것이 낫다.

야쿠자들은 자신에게 패배한 적의 몸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징기스 칸은 자신의 장례식 때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생명을 제거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나 역시도 그런 식으로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길 바래왔다. 영예가 아니라 악명에 불과할지라도 無名으로 남는 것보다는 그쪽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다만 특별하지도 강하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무관심이라는 소극적 보복 수단을 취하는 것 뿐이다.

초자아가 계획하고 명령한 일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에고와 이드는 존중할 가치가 없다. 결과적으로 에고와 이드를 위한 선택이었음에도 이를 존중하지 않는 동물적인 감정을 왜 소중히 여겨야하나? 이런 빌어먹을 게으름과 병적인 위축이라니. 혐오스럽다.

  • 2009년 4월 30일, 열등한 스물 네 살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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