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이것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나 자신이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공개 일기인만큼......
다만...... 대문호도 아니고 그렇다고 싸이코패스 살인마의 자극적인 옥중 기록도 아닌 잡다한 개인의 사변을 남이 읽어줄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 혹 이걸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오만한 인간으로 비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꿈 꾸는 소년이 아니라 현실에 치여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된 어른이다. 내게 쓸모 없는 자기애 따위는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해왔다. 비웃지 말아주길 바란다. 지금부터 왜 그러했는가 설명할 생각이니까.
태어날 때 제법 오만한 구석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뒤틀린 형태로 아직까지 잔존하는 것은 내가 자라온 환경의 문제다. 지인 중 나와 비슷한 유형의 인격 장애를 겪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와 내게는 '자기 자식에 대한 기대가 유별난 어머니'라는 공통 분모가 있다. 내 어머니는 내가 國父가 될 남자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현실적 기대를 한번도 충족시킨 적이 없는 병약하고 둔한 아들에 대한 일종의 현실 부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날 때부터 무능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취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고향을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나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내 잘못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사교성이 없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당초 있던 학교에서는 학급 임원도 하고 친구들 모임에서도 중심에 있던 아이였다. 만약 그곳에서 계속 자라났다면 내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새로운 환경은 이유 없이 내게 적대적이었다. 만약 이유가 있었다면 내가 서울말을 썼다는 것 정도가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서울 출신의 콧대 높은 어머니가 시골 학교에 여전히 남아있는 관행을 싸그리 무시했다는 데 있겠지. 10대 이전에 겪은 상처는 평생 남기 마련이다. 유년기에 겪은 2~3년 간의 고립의 악영향은 여전히 잔존한다. 나이가 먹은 뒤의 실패는 우선적으로 내 책임이었다만 그 '실패하는 나'를 만들었던 것은 저 시절의 경험이 아닐까.
친구가 없던 나는 병적으로 독서에 빠져들었고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어머니가 티브이를 보지 못 하게 한 탓에 나는 내 동년배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취미 생활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년을 보내고 가까스로 고립에서 해방되었을 때, 나는 남들의 화제가 나와는 퍽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불운의 시작이다. 그 뒤로 적대적인 이 세상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혀왔고 나는 거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비현실적인 주문을 했다. 현실이 시궁창이었지만 마치 사후의 천당을 꿈꾸던 중세의 농노들마냥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억눌렀다. 신비주의적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들을 신의 계시로 이해했고 그 안에서 내 평범한 삶은 위대한 인물의 것인냥 포장되었다.
'기독교'라는 마수에서 벗어난 것은 17살 무렵이다. 장밋빛 미래가 섞인 그 믿음의 체계를 뒤엎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는 그것을 믿을 수 없더라.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믿음'이 가진 모순은 내 빈약한 이성으로도 논파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도 그 무렵일 것이다.
내가 좀 더 현명한 인물이었다면 자신에 대한 독특한 관점도 그때 폐기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는 기존의 세계를 벗어나 새롭게 도착한 신대륙에서도 철저히 실패했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더라. 계속되는 실패 앞에서, 나는 자신이 남보다 열등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새로운 믿음 체계를 세워야했다.
그리고 맑시즘 같은 사이비 학문도 시대를 잘 만나면 주류가 되는 것처럼, 내게도 '자신에 대한 막연한 확신'이라는 현실에 대한 기묘한 안티 태제가 등장했다.
나는 대학에서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대학의 공부는 확실히 10대 시절의 공교육보다 적성에 맞았고 썩 좋은 대학을 들어오지 않은 탓에 남보다 적은 노력으로도 더 괜찮은 결과를 만들어내곤 했다.
김일성은 고작 몇 명의 일본군을 죽인 것으로 민족의 영도자라는 신화를 써낼 수 있었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다만 나 역시 대수롭지 않은 몇 번의 지적 성공이 마음 속에 왜곡된 신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때는 행복했었는데.
나는 2006년 여름 간만에 만난 동창생들의 태도에서 왜 내가 그토록 불쾌감을 느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안다. 그 녀석들은 발전했다고 생각했던 내 믿음이 실은 허구라는 걸 가르쳐줬던거다.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한 암울한 현실이 실은 현재 진행형 fact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거지.
- 2009년 4월 30일, 열등한 스물 네 살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