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늦은 밤 산책을 나갔다가 무슨 명절 날 고속도로 톨게이트 마냥 차선이 꽉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교통 사고가 난 줄 알고 그걸 구경하러 맨 앞까지 한참을 걸어 간 나는, 이 차량 행렬의 정체가 학원 끝날 시간에 맞게 기다리는 학부모들임을 알게 되었다.
부모들에게 자신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자녀가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모임에 안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시대는 좋은 대학을 나와도 전 세대만큼 윤택한 삶이 보장되는 않는다. 물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소득 격차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만, 버는 돈이 많을수록 교육비를 더 쓰는 현실을 곱씹어 볼 때, 결국 좋은 대학을 나와도 사는 건 거기서 거기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투자한 만큼 아웃풋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일단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되면 대기업 취업이라는 기회비용이 생겨 다른 진로를 택하기 쉽지 않게 된다.
그렇게 남의 인생을 살다가 뒤늦게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엉뚱한 일을 하거나 배우자와 이혼해서 부모를 엿 먹이는 경우도 흔하다. 아니면 부모가 목숨처럼 염원하던 좋은 대학을 갔다는 그 안도감으로, 죄책감 없이 장년이 되도록 부모 손을 벌리고 사는 경우도 많다. 자녀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억울할 지 모르지만 실은 자업자득이다. 애시당초 자녀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된 방법론으로 이루어지질 않았는데 별안간 하한가를 친다고 누굴 탓한단 말이냐.
한국 부모들은 학원을 줄줄이 사탕으로 보내는 걸 자녀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자녀에 대한 진짜 투자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자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알아가는 것이다.
육아는 안 해봤지만 그게 어렵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당장 유부남들은 집에 일찍 들어가는 걸 참 싫어하더라. 말도 안 통하는 시끄러운 코찔찔이 자녀랑 노는 게 뭐 그리 재밌겠나. 하지만 거기 시간을 많이 쓴 부모들이 결국은 좋은 결과를 보더라. 자녀를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시킬 뿐 아니라 부수적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특히 자녀와 함께 운동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즘 여자 아이들은 성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만큼 조숙하다. 십대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 내가 달리 코멘트할 것은 없지만 초경이 빠르면 보통은 키가 크지 않고 이른 시점에 성 생활을 시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과학적으로 아버지와 꾸준히 운동을 하는 것은 아이의 초경을 늦추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좀 더 뒤로 미룰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남자 아이의 성적 호기심은 부모의 애정과 하등 관계가 없지만 여자 아이의 경우는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예전 검도장을 다닐 때 보았던 일이다. 매일 검도를 나오는 부자(父子)가 있었다.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둘이 합쳐 검도 단수가 두 자리대였다. 거진 10년이 넘게 아버지와 아들이 죽도를 맞대온 것이다. 어딘가 데면데면한 일반적인 그 나이대 부자 관계에 비해 둘은 마치 친구처럼 친밀해 보였다.
어느 날, 그 둘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대화 내용인 즉슨 수능을 본 그 아들이 성균관 대학교 경영을 붙었는데 그냥 포기하고 재수를 한다는 것이었다. 성대 경영을 붙었는데 그걸 버리고 재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원래 꽤 공부를 잘 한다는 의미다.
정말 재밌었던 것은, SKY를 갈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던 우리집과 달리 그 부자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나 고민이 없어보였다는 것이다.
성대도 좋은 대학인데 가지 그러냐, 아뇨 전 그래도 좀 아쉬우니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내가 들은 그 대화에 학벌 지상주의는 없었다. 그냥 농구 시합 한 게임 더 뛰어보겠다는 말처럼 쿨하게 들렸다. 그 둘은 늘 그랬듯 웃고 떠들며 몇 번인가 더 대련하고 함께 샤워하고 집에 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때만큼의 부러움을 느낀 적은 없다.
나는 미래의 내 자식이 공부를 잘할 것으로 예상하지 않는다. 나를 닮았다면 특히 그러할 것이다.
일전 나를 가르친 과외 선생님이 말한대로, 어쩌면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나는 스스로가 한국식 교육 제도의 수혜를 받았노라고 감히 말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가치 평가와 별도로 나는 한국의 교육 제도를 여전히 혐오한다. 나와는 아주 맞지 않았다.
괜찮았던 거라곤 찬찬히 읽어보면 제법 잘 쓰여진 도덕 교과서를 읽는 재미 정도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 삐져나가면 때리기 바쁜 이 병신 같은 나라의 교육 제도가 훌륭할 리 없지 않나. 부모님이 촌지를 주지 않자 나를 왕따시키던 국민학교 선생부터 한국 어른들의 나쁜 특징을 일찍부터 체화한 급우들까지 모든 게 별로였다. 나는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군대가 아니라 고등학교 교실에 갇힌 꿈을 꾼다. 그래도 머리가 좀 굵은 채로 들어간 군대에 반해, 10대 시절 나는 나를 어떻게 지켜야하고, 거의 이종(異種)의 인간마냥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급우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요행으로 잘 넘어가 지금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며 만약 내 삶을 여러 번 시뮬레이션 돌려볼 수 있다면 십중팔구는 잘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내 자녀가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이 사회에서 사는 데에 있어 나와 비슷한 갈등을 겪을 것으로 예측한다.
그렇다고 내 자식의 행복을 위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갈 생각도 없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나 변호사요 하고 대충 뻐기면서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외국을 나가봤자 세탁소 밖에 더 하겠냐. 어차피 나가서 살아도 지상낙원도 아닌 것을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결혼도 안 한 이 시점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일단 희생 따위는 때려치고, 나는 그냥 여기서 태어난 것이 원죄일 것이 분명한 자녀에게 좋은 대학을 들어가라는 목표 따위는 일찌감치 요구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보다는 그때 검도장에서 보았던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시합을 하다보면 승부욕이나 통찰력도 생길 것이고, 그러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자기 주관도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집중해서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