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9시까지 푹 잤다. 그러고도 낮잠을 잤다. 식은 땀 흘리며 저녁잠을 또 잤다.
며칠 밀린 잠을 몰아서 잤다.
앨범 발매와, 그 공연이 끝난 다음 날인 17년 12월 14일부터 백수이길 자처했다. 백수면서도 생업에 관한 일을 멈추진 않았으니 진정한 의미의 백수는 아니었지만 나는 음악을 하지 않길, 더 정확하게는 새로운 무언가를 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으므로 스스로 백수가 되었다.
음악을 등지고, 팀을 나오면서 행복했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도,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그런 것들이 버겁게 느껴졌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지극히 가까운, '내 사람들'하고만 음악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들과의 만남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음악이 싫었던 건지, 사람이 싫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쉬고 싶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부족한 체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 저들 모두가 이유일 것이다.
도망가는 마음으로 일본을 갔고, 다녀와선 쫓기듯 내 방으로 들어와 긴 시간을 보냈다. 살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인 것도 같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막막하기도 했다.
새로운 일을 벌이진 않았지만, 내게 들어오는 일까지 거절할 용기는 없었기에 부탁받은 일은 했다. 처음에는 그 연락마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공연 섭외나 작업 의뢰를 받으면서도 '대체 왜 나를 가만두지 않지?'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어쨌든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하니,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조금씩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작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전보다는 행복했다. 어느 순간 그들과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연주도 더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런 시기에 인도네시아를 가게 됐고, 인도네시아를 다녀오면 이 백수 생활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녀와서는 정말로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공연은 새로 생긴 도서관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하는 큰 공연이었다. 나는 공연 날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제 공연을 하면서 느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기분 좋을 수 없다는 걸. 나는 어제 아침부터 행여 뭔가를 놓쳤을까 하는 마음에 극도로 불안했고, 아침 내내 손을 풀면서도, 악기를 챙기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리허설 시간뿐 아니라 화장할 시간, 렌즈 낄 시간, 커피 마실 시간, 군것질할 시간까지 정해놓고 그대로 행동했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게 날이 서있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대기실에서 30분 동안 누워 있었다. 그대로 집에 가서 뻗어버리고 싶었지만, 저녁엔 홍대에서 합주가 있었다. 공연 의상을 바리바리 들고, 홍대에 가서 늦은 저녁 합주를 했다.
그동안은 늘 바쁘고, 고됐다. 그래서 음악을 직업으로 가진 내 모습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긴 시간 쉬면서야 공연날이 내게는 특별해졌고, 여유를 가지고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둔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생각보다 예민하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삶에 이미 익숙해져있다는 것도 어제 처음 알게 되었다.
스스로 정했던 백수 기간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받았던 상처와, 스스로 몰아세우며 남긴 생채기들이 나를 뒤덮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간은 일의 성취감으로만 행복을 느꼈고, 지나고보니 그게 기형적이었음을 알게 됐다.
백수 일기를 끝낸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일 것이다. 다만 이 백수일기를 스스로 마치는 것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확신을 다시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의 일부는 스팀잇에서 기인했다.
나는 음악만 하고 싶었기에 인생엔 음악 밖에 없었다. 음악 외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계기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기에 주변엔 동료뿐이었다. 스팀잇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직업군,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생각을 볼 수 있었다. 좁게 갇혀있던 시야가 넓어졌다. 사람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다는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음이었고, 새로운 사회의 확장이었다.
이곳에 매일 무언가를 쓰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하려고 했다. 그리고 음악과 책을 옆에 두려 노력했다. 이곳엔 긍정적인 모습을 많이 담고자 했다. 잘 됐는진 모르겠지만 돌아보니 이곳에서 참 많은 위안을 얻었다.
나는 김동률의 음악으로 나원주를 알게 되었고, 나원주를 통해 자화상을 알게 되었지만, 자화상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곡을 쓰고 싶어 안절부절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150일간의 백수 시간은 불안하고 고독했지만 내가 왜 음악을 해야 하는지, 내가 이 일을 얼마나 깊게 사랑하는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투박하지만 쉽게 낡지 않고,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따뜻한 음악을 오래오래 만들 수 있으면 참 좋겠다.
(+ 그리고 그 곡들을 조금이라도 이곳에 올릴 수 있으면,
그래서 그 음악을 당신이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