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6-1 중공군의 제2차 전역이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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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전이후 정치와 군사의 관계에 있어서 제2차 전역이후 남진문제는 중요한 주제였다.

제2차 전역이후 펑더화이는 부대의 정돈과 휴식을 요청했다.
“전쟁은 여전히 장기적이고 험난하다. 적들이 진격에서 방어로 전환하고 전선을 축소하여 병력을 집중시키면서, 정면이 협소해지고 종심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병종이 연합하여 작전하는 것이 유리하다. …적군의 사기가 저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26만여 병력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조선에서 전부 철수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진격해야 한다.”(392, 주 102,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2월 19일, 팽덕회연보, p.456)

저어우언라이도 펑더화이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서울지역에서 적군을 완전히 섬멸시킬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들이 서울을 사수하든 포기하든, 우리 군은 일정기간 동안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393, 주103, 건국이래주은래문고, 제3책, pp.625-626)

소련대사는 이에 부정적이었다
“미국이 신속하게 퇴각하면, 우리군도 신속하게 진격해야 한다. 이는 소련대사의 의견일 뿐만 아니라 조선 노동당 중앙의 다수 동지들의 요구다”라고 했다(392)

마오쩌뚱은 즉시 38선을 넘어 진격하라고 지시했지만 이후의 휴식에는 찬성했다.

전쟁상황은 펑더화이의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제3차 전역에서 38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지만, 유엔군은 계획적으로 철수한 것이었기 때문에 중조연합군은 일부 지역을 점령한 것이외에는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당시 작전상황은 1951년 1월 3일 펑더화이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적들은 방어선이 무너진 후 신속하게 퇴각하고 있지만, 전과는 그다지 크지 않아 겨우 3000명을 포로로 잡았을 뿐이며, 만약 적군이 계속 남쪽으로 퇴각하면 수원까지 추격한 후 명령을 기다리겠다. 이 전투는 서울, 인천, 수원, 이천 등을 점령한 후 전진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보충해야 한다. 만약 적군이 서울을 강하게 방어하면 우리는 각종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강공을 보류하겠다”(393, 주 106)

이와함께 1월 8일 진격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라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했다. 그러나 곧 북한의 강력한 반발에 봉착했다.

김일성은 38도선을 넘어 진격한 후 2달동안 휴식하면서 정비한다는데 동의했지만 신속한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김일성은 차이청원에게 “부대의 휴식과 정돈은 너무 길 필요가 없고 한달 정도면 충분하다. 만약 너무 길어지면 하천과 논, 밭의 얼음이 녹아내려 부대가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가중하고, 적들이 시간을 끌어 장비를 보충하고 숨을 돌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394)

1월 9일 오전 자하로프는 작전중지를 반대했으며 총참모장 대리 니에룽쩐이 설득에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 스탈린이 전보를 보내 지원군을 38선 이북과 그 양쪽해안으로 통제하되 인민군은 계속해서 남하하라고 지시했다.(394, 주 111)

1월 10일 밤, 차이청원은 김일성과 함께 펑더화이의 지휘부에 도착했다. 펑더화이는 지금 휴식하면 다음에 더 많은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휴식에 동의하면서 휴식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자고 제안하면서, 먼저 출동 가능한 3개군을 남진시키고, 다른 부대는 1개월간 휴식시키자고 제안했다.

김일성은 휴식에 동의하면서도 휴식시간을 최대한 줄이자고 제안했다. 먼저 출동 가능한 3개군을 남진시키고, 다른 부대는 1개월간 휴식시키자고 제안했다.

펑더화이는 현재 공격을 진행하면 적들에게 몇개 지역을 포기하게 할 수는 있지만, 적의 주력군을 너무 일찍 부산이라는 협소한 지역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분산시켜 섬멸하는데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김일성은 적을 섬멸하지 못하더라도 점령지를 확대하는 것은 매우중요하다고 주장

펑더화이는 영토확장은 먼저 적을 섬멸시키는 것만 못하다고 말함

김일성은 더많은 지역을 점령하여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이후 치뤄질 선거에서도 유리하다고 주장

펑더화이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며, 현재 임무는 전투에 승리하고 적을 섬멸하는 하는 것이라고 판단
(김일성은 정치적 측면, 펑더화이는 군사적 측면에서 판단)

평더화이는 9일 마오쩌뚱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를 전달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주장한 내용은 개인 의견이 아니라 조선노동당정치국의 집단의견이라며, 심야에 박헌영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오도록 했다.(395, p.112 팽덕회연보, p. 465)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논쟁은 결론을 맺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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