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5-2 조중지휘권 통일문제의 대두

북중관계.jpeg

항미원조 제1차 전역기간(1950년 10월 25일-11월 5일)에 펑더화이는 중국과 북한간 언어의 불통, 지형의 미숙함, 도로 통제등의 문제에서 협조가 부족해 작전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385, 주84,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25일, 11월 2일)

11월 4일 지원군 제39군이 박천 동남쪽에서 미군 제24사단을 협공하고 있을 때, 순천으로 공격하고 있던 인민군 탱크의 공격을 받아 포위되었던 상대편이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자 공급, 교통운수 등에서도 통일된 협조와 지휘가 없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펑더화이는 김일성에게 작전수행 중 지휘통일을 제안하면서, 인민군 총부가 지원군 총부에 가능한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를 희망했다.

11월 78일 펑더화이는 박일우에게 김일성을 만나 다음 사항을 협의하라고 요청했다.

  1. 적 후방에 전투거점을 확보하는 문제
    쉬티코프가 중국의 주장을 단호하게 지지하면서 김일성은 동의했다.

  2. 양국군의 협력문제
    김일성은 참모를 파견해 통신연락과 정보교환을 담당할 것을 주장하면서, 양국군 사령부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연합지휘하는 것을 반대함

  3. 북한이 포로를 학대하는 문제
    심지어 영국과 미국 대사관 직원까지 탄압을 받고 있는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 펑더화이는 완곡하게 의견을 제시했다고 함.(션즈화는 완곡하게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지만 여기서 ‘완곡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실제 제대로 이야기 하지 않은 것)

  4. 병역을 기피한 조선의 일반군중에 대한 문제
    김일성은 지원군이 탈영자들 소환업무를 돕는 것은 동의했으나, 사실상 이들에게 반역죄를 씌워 무력토벌을 준비했다(386, 주86)

펑더화이는 인민군 제6사단이 아직 6,200명 정도 남아 있고, 지원군 125사단과 합류해 있기 때문에 현지에 남아 지원군과 협력해 작전을 진행할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중앙군사위원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제6사단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겠다고 주장

이후 제7사단의 5,000여명이 125사단에 합류했고 펑더화이는 이 사단의 잔류를 김일성에게 요청했으나 거부

북한과 북한주둔 소련 군사고문은 펑더화이가 제안한 몇 십 km 철수해 매복해서 제2차 전역(1950년 11월 25-12월 24) 을 준비하자는 방침에 반대하면서 지원군이 계속해서 청천강 이남으로 적을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387, 주87, 펑더화이가 김일성에게 전달하라고 군사위원회에 보낸 전보, 1950년 11월 9일;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 보낸 전보, 1950년 11월 18일)

김일성은 인민군의 지휘권 이양을 원하지않았다. 한편 션즈화는 김일성이 중국군을 지휘하겠다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막 수십만 인민군을 상실한 상황에서 다시 수십만 중국군을 지휘하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387)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은 자신들의 참전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조우언라이는 ‘중국지원군’이 아니라 ‘중국인민지원군’임을 특별하게 강조했다. 그리고 11월 2일 전보에는 김일성의 연설에 ‘지원군부대가 인민군총사령부의 지휘아래 작전에 참가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는 중국이 정식으로 참전한 것을 숨기기위한 위장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중국은 인민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싶어했다.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Join the conversation now
Logo
Center